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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명 치료 못 받게 했다···중환자실서 3년 알박은 환자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조용수의 코드클리어(78) 

대학병원 중환자실 입원 기간은 보통 1주일이다. 어지간한 환자는 그 정도면 결판이 난다. 죽거나 혹은 낫거나. 얼추 견적이 선다 싶으면 의사는 지체 없이 움직인다. 가망 없는 환자는 작은 병원으로 이송하고, 버틸만한 환자는 일반 병실로 옮긴다. 중환자실에서 찬찬히 두고 보는 경우는 많지 않다.

“호전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연고지 병원으로 옮기신 후 환자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십시오.”
“이 정도면 많이 좋아졌습니다. 작은 병원에서도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이송 권유에 순응하는 환자는 많지 않다. 대부분 단호하게 거절한다. 미적미적 시간을 끄는 환자도 많다.

“옮기고 싶지 않습니다. 끝까지 여기서 치료하겠습니다. 절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작은 병원은 아무래도 불안합니다. 큰 병원에서 치료받아야 안심이 될 거 같습니다.”

보내려는 의사와 버티려는 보호자, 그사이에 벌어지는 팽팽한 줄다리기. 중환자실은 언제나 부족하다. 많은 환자가 대학병원 중환자실 빈자리를 오매불망 기다린다. 며칠이고 응급실에 체류하며 순번을 기다리는 중증환자도 있고, 작은 병원에서 옮겨오지 못한 채 발만 구르는 응급환자도 있다. 그리고 그들 중 적지 않은 수는 결국 중환자실 문턱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사망한다.

작은 병원으로 이송이 싫다는 저들도 한때는 마찬가지 처지였을 터. 누군가 자리를 비워줘서 자신들 순번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빌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자리를 배정받고 나면 과거는 금세 잊어버린다. 되려 기다린 만큼 뽕을 뽑으러 든다. “나만 살면 돼”라며, 뒤를 돌아보지 않게 된다.

대학병원 중환자실 입원 기간은 보통 1주일이다. 어지간한 환자는 그 정도면 결판이 난다. 얼추 견적이 선다 싶으면 의사는 지체 없이 움직인다. [사진 Marcelo Leal on Unsplash]

대학병원 중환자실 입원 기간은 보통 1주일이다. 어지간한 환자는 그 정도면 결판이 난다. 얼추 견적이 선다 싶으면 의사는 지체 없이 움직인다. [사진 Marcelo Leal on Unsplash]

최근 모 포인트가 사회적 이슈였다. 부도(?)난 상품권이 폭탄이 되었다. 빨리 처리하지 못하면 손해가 불가피했다. 사람들은 부도 소식을 미처 전해 듣지 못한 가게를 물색했다. 자신들이 들고 있는 폭탄을 떠넘기기 위해서. 그들은 부리나케 달려가 상품권을 처리하고는 기쁨에 환호했다. 가게 주인이야 죽거나 말거나. 그 모습을 보며 나는 3년 넘게 중환자실에 알박기한 얌체 환자가 떠올랐다. 나만 피해를 보지 않으면 된다는 그 심보는, 나만 치료받으면 된다는 심보와 어찌 그리 닮았는지. 나도 피해자라는 항변은, 나도 아픈 환자라는 항변과 어찌 그리도 닮아있는지.

모 포인트와 관련해 어느 가게 이야기를 들었다. 코로나 때문에 하루하루를 힘들게 버티던 자영업자 이야기였다. 오랜만에 손님들이 몰려와서, 어머니는 모처럼 활기 넘치게 일했단다. 하지만 손님이 모두 떠난 저녁. 텅 빈 식당에서 벼락같은 소식을 전해 듣고, 그녀는 돌아서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딸이 올린 그 망연자실한 사연을 들으며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 들었다. 그렇다. 폭탄은 돌고 돌아 사회의 가장 약한 곳에 굴러떨어진다. 약한 자는 살아남을 수 없는 우리 사회는 만인을 향해 투쟁하는 정글이다. 중환자실도 마찬가지. 대기하느라 발을 구르는 이들은 죽음에 가장 가까이 있는 환자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질병은 사회적으로 약한 이들에게 더욱더 쉽게 찾아든다.

중환자실에서 3년을 버틴 환자. 자그마치 3년! 그 긴 시간 환자가 이 사회에서 앗아간 것은 다른 150명의 치료 기회였다. 그들에게 자리를 양보했다면, 적어도 몇 명은 새 생명을 얻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의 생명을 태워 가며 숨 쉬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고 3년의 치료로 그의 상태가 좋아진 것도 아니었다. 가망 없는 식물인간 환자였고, 조그만 병원에서 관리해도 충분한 상태였으니까. 결국 모두가 불행해졌다.

누군가는 나에게 이렇게 반론했다. 식물인간이 되어도 포기하지 못하는 가족들 마음을 헤아려보라고. 나는 속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는 당신은 왜 다른 대기 환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나요?’ 또 다른 누군가는 나에게 이렇게 쓴소리했다. 중환자실을 팍팍 늘리면 되지 않느냐고. 물론 이번에도 속으로 대답했다. ‘은행에서 돈을 계속 찍어내기만 하면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나요?’법원도 실망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들은 환자와 보호자가 동의하지 않는 이송은 엄두도 내지 못하게 했다. 환자와 의사 사이의 계약에, 제3자의 치료 기회 박탈은 고려사항이 아니라고 했다.

사회가 요지경이니 이제 나도 후회스럽다. 맛집에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며, ‘다 먹었으니 얼른 자리 비켜주자’며 후다닥 가게에서 나와주었던 지난날의 내 모습이 떠올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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