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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옵서버석서 회원석까지, 1m 가는데 42년 걸렸다 [유엔 가입 30주년 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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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은 시작부터 유엔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1948년 12월 11일 유엔 총회 결의 195호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인정받았다. 유엔군의 6ㆍ25 전쟁 파병 근거가 된 건 1950년 6월 27일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 83호였다.

하지만 유엔은 자기가 낳은 자식을 쉽게 품지 않는 엄한 부모 같았다. 미국과 옛 소련의 대립구도로 수십년 간 한국의 유엔 가입은 좌절됐고, 냉전이 끝난 뒤인 1991년에야 유엔에 입성했다. 이후 유엔 사무총장 배출, 두 차례의 안보리 비 상임이사국 수임 등 한국은 ‘준비된 회원국’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중앙일보는 한국의 유엔 가입 30주년을 맞아 한국 '유엔 외교'의 과거와 현재를 짚어본다.

①42년 걸친 ‘유엔 입성’ 도전기, 그 막전막후 [하(下)]

1990년 최호중 (오른쪽) 외무부 장관과 소련의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은 뉴욕 유엔 본부에서 한·소 수교합의서에 서명했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낳은 성과이자, 한국의 유엔 가입을 위한 거대한 장애물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중앙포토]

1990년 최호중 (오른쪽) 외무부 장관과 소련의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은 뉴욕 유엔 본부에서 한·소 수교합의서에 서명했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낳은 성과이자, 한국의 유엔 가입을 위한 거대한 장애물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중앙포토]

90년 한ㆍ소련 수교 이후 유엔 가입 시도 때마다 매번 발목을 잡았던 소련의 거부권은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됐다. 문제는 또다른 거부권을 갖고 있는 중국이었다.

노창희 당시 주유엔 대사는 회고록에서 “중국은 남북 유엔 가입 문제는 당사자인 남북 합의 하에 이뤄져야 한다는 원론적 말만 반복하며, 한국이 선(先)가입을 신청할 경우에 거부권을 행사할 것인지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언제든 한국의 유엔 가입에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상임이사국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으니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내 중국 측에서 묘한 기류 변화가 감지됐다.

이규형 전 주중대사는 1990년 "한국이 올해는 가입 신청을 하지 말아달라"는 중국 정부의 메시지를 확인한 이후 유엔 가입을 확신했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이규형 전 주중대사는 1990년 "한국이 올해는 가입 신청을 하지 말아달라"는 중국 정부의 메시지를 확인한 이후 유엔 가입을 확신했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이규형 전 주중 대사(1991년 남북 유엔 동시 가입 당시 외무부 유엔과장)는 90년 가을 외무부 본부로 날아온 홍콩발 전문을 받은 순간을 지금도 기억한다. “아, 이제 다 됐다”고 주먹을 불끈 쥘 만한 사건이었다.

“90년 10월쯤 중국 신화사 홍콩분사 부판무관이 우리 총영사를 만나 중국 정부의 메시지를 전했다는 거에요. 그런데 내용이 ‘한국이 올해는 가입 신청을 하지 말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신화사 홍콩분사는 사실상 중국의 대사관 같은 역할을 하는, 중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조직이었어요. 그런데 금년에는 하지 말아달라? 그럼 내년에는? 내년에는 한국의 유엔 가입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전문을 받아보고선 ‘아 이제 우리 가입은 시간 문제구나’라고 감을 잡았습니다.”

#“북한 없어도 가입한다” 최후통첩

기회가 큰 파도처럼 한꺼번에 몰려오는 격변의 시기였다. 유엔 현지에서도 급박하게 움직였다.

북한은 여전히 동시 가입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여러 국가들을 상대로 한국의 가입 시도에 반대해달라는 외교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90년 5월에는 김일성이 또 다시 단일 의석 가입 제안을 내놨다. “국호는 하나로 하고 6개월씩 번갈아가며 회원국 지위를 맡아서 하자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규형 전 대사)였다.

기회란 머리만 있고 꼬리는 없어서, 한번 놓치면 뒤늦게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건 역사가 여러 차례 입증한 진리였다. 극약처방이 필요했다.
91년 4월 5일 한국은 북한에 대한 최후통첩에 해당하는 문서를 작성해 안보리에 제출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91년도 총회에서 유엔 가입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북한이 입장을 바꿔 동시 가입에 응하게 하기 위한 ‘선(先)가입 압박수’였다. 노창희 대사는 이를 “루비콘강을 건너는 각오로 만든 출사표이자 북ㆍ중을 향한 최후통첩”이라고 표현했다.

#막판 중ㆍ소의 대북 압박

이 때쯤 북한의 상황은 어땠을까. 주영국 북한 공사 출신의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이 펴낸 책 ‘3층 서기실의 암호’에 따르면 “김일성의 생애 마지막 좌절”이라고 할만한 상황이었다.

1991년 당시 리펑(왼쪽) 중국 총리는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 "중국은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을 지지할 수 밖에 없다"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북한이 유엔 가입에 반대할 경우 한국의 단독 가입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중앙포토]

1991년 당시 리펑(왼쪽) 중국 총리는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 "중국은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을 지지할 수 밖에 없다"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북한이 유엔 가입에 반대할 경우 한국의 단독 가입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중앙포토]

태 의원은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당시 이미 소련은 남북 유엔 가입을 지지한다고 밝힌 상태였다. 북한으로선 어쨌든 상임이사국인 중국만 동의하지 않으면 되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중국을 잡자고 올인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작 중국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고 태 의원은 설명했다.

“91년 5월 중국 리펑(李鵬) 총리가 평양에 와서 김일성을 상당히 오랜 시간을 들여 설득했습니다. 중국이 추진하는 개혁개방 정책 등 내부 사정을 설명하면서 ‘김일성이 반대하든 아니든 중국은 남북한의 유엔 가입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는 최후통첩을 김일성에게 하고 돌아갔습니다.”

얼마 뒤에는 북한 주재 소련 대사도 비슷한 입장을 북한에 전했다. 태영호 의원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에서 핵심은 적화통일인데, 유엔 동시가입이란 것은 소련과 중국이 한국을 인정한다는 뜻이고 이는 곧 북한이 무력으로 적화통일을 하는 것을 소련과 중국이 도와주지 않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고 설명했다.  

#“수령님 결단” 북한의 동시가입 수용

유엔 가입 외교전의 판세는 이미 ‘남북 동시가입’으로 크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 사이 유엔에서는 남북 대사가 만나 의미심장한 문답을 주고받았다.

노창희 대사는 91년 5월 27일 북한 유엔 대표부의 요청으로 박길연 주유엔 북한 대사를 만났다. 박 대사는 “본국 지시”라며 “동시가입이 어려울 경우 한국이 단독가입하겠다는 뜻에 변함이 없느냐”고 세 번에 걸쳐 확인한 뒤 돌아갔다.

남북 유엔 동시 가입 사실을 알리는 1991년 9월 18일자 중앙일보 1면. [중앙포토]

남북 유엔 동시 가입 사실을 알리는 1991년 9월 18일자 중앙일보 1면. [중앙포토]

한국이 이미 공개적으로 밝힌 입장을 재확인하는 데 그친 이 싱거운 문답이 결국 북한이 동시 가입을 수용하기 전 명분을 쌓기 위한 마지막 요식행위였다는 사실은 불과 몇 시간 뒤 드러났다. 북한 외무성은 이튿날인 5월 28일 공식 성명을 통해 “남조선에 의해 조성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유엔 가입을 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며 동시 가입을 선언했다.  

태영호 의원이 책에서 전한 당시 북한 내부 상황은 이렇다.
“91년 5월쯤 김정일의 지시가 외무성에 내려왔다. ‘수령님이 유엔 동시가입에 동의하는 결단을 내렸다. (대신)우리는 중ㆍ소가 조선과 미국의 외교관계 설정을 보장하라고 관철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160·161번째 나란히 가입

이후 조바심을 보인 쪽은 북한이었다. 특히 가입 신청서 제출 시기를 두고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태영호 의원은 “만에 하나 한국 가입안이 먼저 통과되고, 북한 가입안이 두번째로 상정됐는데 미국, 영국, 프랑스가 약속을 깨고 동의하지 못하겠다고 할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대응책이 있어야 했다”며 “이에 북한은 한국보다 한 달 정도 앞서 가입을 신청하면서 미ㆍ영ㆍ프가 북한 가입에 동의하게 하도록 중국, 소련과 최종 조율을 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1991년 노창희(오른쪽) 당시 주유엔 대사가 케아르 유엔 사무총장에게 한국 정부의 유엔 가입 신청서를 전달하는 모습. [중앙포토]

1991년 노창희(오른쪽) 당시 주유엔 대사가 케아르 유엔 사무총장에게 한국 정부의 유엔 가입 신청서를 전달하는 모습. [중앙포토]

실제 북한은 한국보다 앞선 7월 8일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다. 한국은 8월 5일 제출했다. 이에 대해 노창희 대사가 내놓은 설명은 이렇다.

“북한은 동시가입하기로 한 뒤 눈에 띄게 우리 눈치를 살폈다. 6월 중순쯤 박길연이 우리의 가입 신청 시기를 묻길래 우리는 국회 동의 절차가 있어 8월 초쯤 될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해줬다. 순서상으로 우리 뒤가 되지 않길 바라는 눈치였다. 아니나 다를까, 북한은 우리보다 한 달 정도 앞서 신청서를 제출했다.”

일종의 배려였다는 취지다. 그렇게 북한은 160번째, 한국은 161번째 유엔 회원국이 됐다.

#그 1m를 건너기까지

1991년 9월 17일 당시 이상옥 외교부 장관이 한국의 유엔 가입 직후 유엔 총회에서 발언하는 모습. [유엔 제공]

1991년 9월 17일 당시 이상옥 외교부 장관이 한국의 유엔 가입 직후 유엔 총회에서 발언하는 모습. [유엔 제공]

제46차 유엔 총회 개막일인 91년 9월 17일 유엔 가입이 최종승인된 뒤 이상옥 외교부 장관은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한 오늘, 남북한의 유엔 가입은 한반도에서 냉전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새로운 출발을 예고하는 날이 되길 기원한다”며 동시가입의 감회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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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총회 회의장에서 서럽던 옵서버의 자리에서 회원국 자리까지는 통로 하나를 사이에 둔 불과 1m 거리. 하지만 우리에게는 너무나 멀었던 1m를 42년이 걸려 뛰어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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