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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서 힘이 빠졌다”…흔들리는 스가 재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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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지난 9일 오전,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가 나가사키(長崎)시에서 열린 ‘원폭 희생자 위령 평화기원식’에 1분 지각했다. “화장실에 들르느라 늦었다”고 해명했지만, “몸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앞서 6일 히로시마(廣島)에서 열린 같은 행사에선 연설 원고를 한 단락 통째로 빼먹고 읽어 논란이 됐다. “총리 눈에서 힘이 빠졌다”는 측근의 말이 나왔다.

지난 7월 30일 코로나19 관련 기자회견에서 질문을 듣고 있는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7월 30일 코로나19 관련 기자회견에서 질문을 듣고 있는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총선 승리 후 재집권' 노렸지만
코로나 확산으로 전략에 차질
당내 스가 지지파·교체파 대립
아베·아소 속내, 스가 떠나나

그런 스가 총리가 21일 도쿄(東京)의 한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는 소식까지 전해지자 일본 정계가 뒤숭숭하다. 딱 1년 전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가 갑자기 병원을 방문한 후 11일 만에 건강을 이유로 전격 사의를 표한 기억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아베의 남은 임기를 물려받은 스가 총리의 자민당 총재 임기, 즉 일본 총리 임기는 오는 9월 30일까지다. 본래 자민당 총재 임기는 3년. 스가 총리는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과 올림픽 성공이라는 중대 과제를 안고 취임하면서 ‘잔여 임기 1년+새 임기 3년’의 계획을 짰다고 일본 언론들은 전한다. ‘코로나19 수습→도쿄올림픽 성공적 개최→중의원 해산 후 선거 승리→자민당 총재 무투표 재선’으로 이어지는 낙관적인 시나리오다.

멀어지는 ‘해산 후 재집권’ 전략

하지만 이 시나리오는 초장부터 흔들렸다. 감염력이 센 변이 바이러스의 등장과 백신 접종 지연으로 코로나19 확산세가 잡히지 않았다. 반대 여론이 60%가 넘는 가운데 올림픽을 강행했다. 올림픽 자체는 무리 없이 끝났지만, 이후 코로나19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하면서 정권에 대한 반감은 더욱 강해졌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공영방송 NHK 조사에서 스가 정권 지지율은 취임 당시 62%에서 8월에는 29%까지 떨어졌다. 직전 아베 2차 내각은 7년 8개월간 한 번도 지지율이 35%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 스가 총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계획대로 패럴림픽이 끝난 후 중의원을 해산해 10월 중 총선거를 먼저 치르고, 이후로 미뤄지게 될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당내 심판을 받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중의원을 해산하지 않고 9월 말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승리한 후, 그 기세를 몰아 중의원 선거를 이끄는 것이다.

올림픽 전까지는 첫 번째 시나리오가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졌지만, 현재는 두 번째가 유력하다는 설이 다수다. 전국 코로나19 하루 감염자가 2만 명을 넘고, 도쿄 등 수도권을 비롯한 13개 도시에 다음달 12일을 기한으로 긴급사태가 선언된 상태에서 총리가 ‘해산 타이밍’을 찾기 힘들 것이란 전망이다. 긴급사태 하에서의 해산은 “무책임하다”는 역풍을 부를 가능성이 높은데, 현재 확산세라면 긴급사태가 언제 해제될지 가늠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지지나 교체냐’ 분열하는 자민당

자민당내 움직임은 아직 안갯속이다. 9월 말 열리는 총재선거에서 스가의 재선을 지지하는 분위기와 혼란을 틈타 권좌를 노리는 움직임이 혼재하고 있다.

이미 총재선거 출마 의사를 밝힌 사람은 두 명이다.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전 총무상과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 정조회장은 20일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자민당 간사장을 만나 차기 총재선거에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산케이신문이 전했다.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환경상. [로이터=연합뉴스]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환경상. [로이터=연합뉴스]

여론조사에서 ‘차기 총리감’으로 지지를 받는 유력 주자들의 동향은 엇갈린다. 여러 조사에서 인기 1위로 나타난 고노 다로(河野太郞) 행정개혁담당상은 “우선 백신 접종 등 지금 일을 확실하게 하고 싶다”며 출마 여부에 대해 말을 아꼈다.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郞) 환경상은 20일 회견에서 “스가 총리가 아니었다면 재생가능 에너지 최우선 계획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스가의 재선을 지지했다.

1년 전 선거에서 스가 총리에 이어 2위를 기록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전 정조회장은 19일 파벌 모임에서 “총재 선거 일정이 확정되면 확실히 정하겠다”며 출마 가능성을 열어뒀다. 당시 3위였던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간사장은 20일 한 방송에서 “스가 총재를 선출했고 지지해야 할 입장에 있는 분들이 코로나19 확산 속에 입후보하는 데 위화감을 느낀다”고 비판해 사실상 출마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아베 마음은 이미 돌아섰다?

자민당 총재 선거는 결국 당내 파벌들의 지지로 결정된다. 키를 쥐고 있는 것은 당내 최대 계파인 호소다파(96명)에 절대적 영향력을 가진 아베 전 총리와 두 번째로 큰 파벌인 아소파(54명)의 수장인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다.

지난해 9월 14일 아베 신조(왼쪽) 당시 일본 총리가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승리한 스가 요시히데에게 꽃다발을 건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9월 14일 아베 신조(왼쪽) 당시 일본 총리가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승리한 스가 요시히데에게 꽃다발을 건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최근 이들이 스가에게서 돌아섰다는 보도가 잇따른다. 마이니치신문은 18일 “자민당 내에서 ‘당의 얼굴’(총재)을 바꿔 달라고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아베 전 총리와 아소 부총리가 ‘스가 끌어내리기’에 들어갔다는 관측이 나온다”고 전했다.

시사주간지 주간포스트도 최신호에서 “아베ㆍ아소와 스가 총리 사이에 균열이 일어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아베와 아소는 이번 총재 선거를 통해 당내 유력자인 니카이 간사장을 교체하고 싶어하는데 니카이 간사장의 지지를 받는 스가 총리가 이에 동의하지 않자 등을 돌렸다는 분석이다.

일본 정계의 한 소식통은 “자민당 내 ‘스가 이지메(집단 따돌림)’가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현재는 스가를 대신할 인물이 없어 보이지만, 누군가 언급되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분위기는 달라질 것”으로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