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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퍼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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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강기헌 기자 중앙일보 기자
강기헌 산업1팀 기자

강기헌 산업1팀 기자

“연방준비제도는 합리적이고 설득이 가능한 테이퍼(taper)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 이사가 2013년 4월 30일 시작된 정책 만남에서 한 말이다. 테이퍼는 ‘점점 가늘어지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그해 5월 22일 “자산 매입 속도를 줄이는 결정을 할 수 있다”며 테이퍼링(tapering)이란 말을 처음 사용했다. 테이퍼링은 그렇게 금융 용어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2013년 5월, 1.6% 수준이던 미국 국채 10년 금리가 그해 9월 3%를 넘겼다. 세계 금융 시장은 요동쳤다. 신흥국은 대규모 자본 유출을 피할 수 없었다. 달러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중국에선 단기 금리가 급등했다.

테이퍼링은 마라톤이 원조(元祖)다. 훈련 빈도에 변화를 주지 않고 달리는 속도나 거리를 낮추거나 줄여 경기 일정에 맞춰 컨디션을 조절하는 것을 일컫는다. 마라톤 전문 홈페이지 ‘마라톤 온라인’에 따르면 테이퍼링란 말은 1947년 미국 카럴레와 고턴 박사의 논문에서 처음으로 쓰였다.

이후 ‘인간 기관차’라 불린 에밀 자토펙(1922~2000)이 테이퍼링을 널리 알렸다. 자토펙은 1950년 유럽선수권 대회를 앞두고 강도 높은 훈련에 돌입했다 2주간 병원 신세를 졌다. 퇴원 이틀 후 참가한 5000m와 1만m에서 그는 자신이 세운 최고 기록을 갈아치우고 우승했다. 강제휴식이 최고의 몸 상태를 만든 것이다. 테이퍼링이 자토펙 현상(Zatopek Phenomenon)이라 불리는 이유다.

연방준비제도가 지난 7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연내 테이퍼링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국내 증시가 급락했다. 이목은 23일로 예정된 잭슨홀 미팅에 쏠린다. 주요국 중앙은행 총재와 경제 전문가들이 모인 잭슨홀 미팅에서 테이퍼링 발언이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공식적인 테이퍼링 진입이다. 결과에 따라 국내 주식시장은 물론 세계 금융시장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 인상에 나설 가능성도 크다.

테이퍼링을 관통하는 진리는 간결하다. 돈은 무한정으로 풀 수 없고 인간은 쉬지 않고 달릴 수 없다. 금융시장도 마라토너도 테이퍼링을 피할 수 없는 이유다. 물론 코로나바이러스 방역은 예외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