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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미안해하지 마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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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정진호 기자 중앙일보 기자
정진호 경제정책팀 기자

정진호 경제정책팀 기자

35년 7개월. 어머니가 군에서 복무한 기간이다. 지난달 30일은 어머니의 마지막 출근이었다. 1985년 입대해 하사로 임관한 어머니는 원사 계급장을 달고 군 생활을 마쳤다. 그날 가족 외식을 마치고 혼자 집으로 돌아오니 가족 단톡방에 어머니가 보낸 메시지가 와 있었다. “가족 모두의 희생으로 무사히 전역했다. 고맙고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는 나와 동생 앞에서 한 번도 직장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말은 안 했어도 20대 초반에 부사관으로 군 생활을 시작해 남성들의 세계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냈으리라 짐작은 했다. 힘든 내색 없던 뒤편엔 가족을 못 챙겼다는 미안함이 있었다는 건 이제야 알았다.

어머니는 야간 훈련이나 당직 근무를 마친 다음 날 집에 들어와서도 밥을 하고 세탁기를 돌렸다. 청소나 설거지 같은 여타 집안일도 따라붙었다. 함께 살던 할머니가 어린 두 남매를 돌봐줬지만, 기억하지 못 하는 어린 시절엔 기저귀를 갈고 먹이고 재우는 일에도 어머니가 관여했을 것이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지난달 27일 서울대 약학대 106년 사상 처음으로 여성 학장이 된 오유경 교수도 같은 고백을 한다. 오 교수는 기자에게 “모든 일하는 어머니가 아이에게 미안함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 후 연구원 과정을 마치고 1999년 한 대학의 교수 면접에서 그는 ‘아기는 누가 보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오 교수는 “20년 전 내가 겪어온 어려움을 지금의 후배 여성 과학자들도 똑같이 겪고 고민하고 있다”며 “양육 시스템이 바뀌지 않으면서 결국 또 다른 누군가의 어머니가 돕지 않으면 자녀가 있는 여성이 꿈을 펼칠 수 없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1999년 당시 3살이었던 아이를 돌봐줄 아주머니를 7번이나 다시 찾아야 했고, 8번째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았다.

미국의 임상심리학자인 다시 로크먼은 『은밀하고도 달콤한 성차별』에서 워킹맘들이 얽매이지 않는 직장인과 늘 가정에 있는 엄마라는 양립 불가능한 압박에 시달린다고 지적했다. 그는 “(과거와 비교하면) 가정 밖에서는 여성에 대한 기준이 바뀌었지만 가정 안에서는 전통적 기준이 강하게 남아있다”며 “여전히 여성이 희생해야 한다는 이념이 지배적이다”고 말한다. 이 책의 부제는 ‘모든 걸 다 잘해야 하는 여자와 한 가지만 잘해도 되는 남자의 탄생’이다.

‘MZ세대’라는 말에 따라붙는 여러 특성을 굳이 나열하지 않더라도 어머니와 같은 워킹맘의 희생에 더는 기댈 수 없다는 건 합계 출산율 0.84명(2020년 기준)이라는 통계가 보여준다. 당신이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의 어머니만을 위한 위로가 아니다. 워킹맘이어서 미안해야 하는 나라엔 희망이 안 보여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