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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갑작스러운 대출 규제는 또 다른 위기 낳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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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서울의 한 시중은행 주택자금대출 창구. [연합뉴스]

서울의 한 시중은행 주택자금대출 창구. [연합뉴스]

주택대출 전면 중단에 신용대출도 축소

가계빚 줄여야 하지만, 충격 최소화해야

시중은행들이 가계대출을 갑작스레 중단하기 시작했다. 그간 생활고에 시달리며 대출에 의존했거나 ‘영끌’과 ‘빚투’에 나섰던 사람들은 사면초가의 형국이다. NH농협은행이 오는 24일부터 11월 말까지 신규 주택담보대출을 전면 중단한다. 기존 대출의 증액과 대환대출도 불가능하다. 단위 농·축협도 집단대출 중단을 선언했다. 우리은행과 SC제일은행은 각각 전세자금대출과 주택담보대출을 일시 중단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주요 은행들은 신용대출 한도를 돈을 빌리는 사람의 연봉 수준으로 제한할 방침이다.

은행들의 갑작스러운 대출 규제의 이면에는 금융 당국의 수장 교체가 있다. 정은보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6일 취임 직후 은행 담당자를 불러 신용대출 한도를 대폭 삭감하는 조치를 지시했다고 한다. 고승범 금융위원장 후보자도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가계부채를 통제하겠다.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규제의 일정도 점검하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농협은행의 경우 올해 상반기 가계대출 증가율이 금융 당국의 관리 범위인 5%를 넘어 강력한 대출 억제 요구를 받았다고 한다.

금융 당국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올 들어 가계대출이 급증하고 있는 점은 우려스럽다. 7월 현재 가계부채 규모는 1936조원으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100%를 넘어섰다. 증가 속도 또한 전년 대비 9.5%로 주요국 가운데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물가상승 압박뿐 아니라 올해 안으로 예정된 금리 인상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도 가계대출 관리는 필요하다. 정부는 대출 규제를 통해 집값 상승을 잡아보겠다는 계산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갑작스럽게 예측 불가능한 대출 규제가 시행되면 자금이 꼭 필요한 사람들이 대출을 받을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가계대출 급증이 누구 때문인가. 따지고 보면 부동산 정책 실패와 집값 급등이 주요 원인의 하나다. 정부는 그간 주택 공급은 외면하고, 규제 일변도로 집값을 회복 불능의 지경까지 올려놨다. 정부를 불신하게 된 국민은 ‘영혼이라도 끌어모아’ 집을 샀다. 그마저도 못해 ‘벼락거지’가 된 국민은 턱없이 올라간 전·월세금을 보태기 위해 또 빚을 내야 하는데, 이마저도 불가능한 형국이 됐다. 당장 가을 이사철을 앞두고 다락같이 올라간 전세금을 마련해야 하는 사람들은 앞길이 막막하다.

계약 만료나 이사를 앞두고 대출은 얼마를 해야 하는지, 이자는 얼마까지 견딜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사람들에게 예기치 않은 대출 중단은 심각한 혼란을 낳을 수 있다. 돈줄을 조이더라도 부작용 없게 충분한 예고와 시간을 주고 준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연착륙을 못하면 더 큰 위기가 올 수도 있다. 금융 당국과 시중은행들은 보다 정교하게 시장 충격을 최소화하는 정책을 강구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