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불 지옥이 만든 비극…탈출 인파속 두살배기도 짓밟혔다

중앙일보

입력 2021.08.22 17:25

업데이트 2021.08.22 20:12

탈레반이 점령한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이 일주일째 공포와 혼돈 속에 빠져있다. 카불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 앞은 여전히 탈출 인파가 몰려 있고, 반대로 카불 시내는 탈레반의 보복 처형을 두려워한 시민들이 자취를 감추면서 적막이 감돌고 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카불 공항에 몰려든 인파에 두 살배기 유아가 21일(현지시간) 압사했다. 미국 기업을 위해 일했던 한 여성 통역사는 당시 남편과 몸이 불편한 부모, 두 살배기 딸 등과 공항 게이트 밖에서 안으로 진입하려는 군중 속에 섞여 있었다.

인파에 떠밀린 그가 바닥에 넘어졌지만, 사람들은 그의 머리를 발로 차며 그대로 지나갔다고 한다. 이 여성은 서둘러 아이를 찾았지만 딸은 이미 군중에 밟혀 사망한 뒤였다. 그는 NYT와 전화 통화에서 “완전한 공포를 느꼈다”며 “나는 아이를 구할 수가 없었다”고 오열했다.

바락 라비드 왈라뉴스 특파원이 21일(현지시간) 한 국제단체 관계자의 영상이라며 올린 카불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 인파가 몰려있다. [트위터 갈무리]

바락 라비드 왈라뉴스 특파원이 21일(현지시간) 한 국제단체 관계자의 영상이라며 올린 카불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 인파가 몰려있다. [트위터 갈무리]

“우린 지옥에 갇혔다”

카불 공항 인근에는 미국이 정한 탈출 시한(8월 31일)을 맞추기 위해 수천 명의 인파가 여전히 몰려있다. 탈레반 대원들이 이들을 향해 혼란 통제 명목으로 최루탄이나 총을 쏘면서 인명 피해도 발생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카불 공항의 혼란 속에 최소 15명이 총에 맞았다. 로이터통신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군 관계자를 인용해 지난 7일 동안 사망한 사람이 최소 20명이라고 전했다. 미처 공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아이를 철조망 위로 던지거나, 공항 벽을 기어오르기도 했다. 나흘째 공항 게이트 밖에서 대기 중인 한 여성은 가디언에 “가족 4명이 미국에서 비자를 받아 공항 내 캠프 설리번으로 가라는 안내를 받았는데, 공항을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며 “우리는 지옥에 갇혔다”고 말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미 합동참모본부 행크 테일러 육군 소장은 “탈레반 점령 이후 일주일 간 카불에서 미국인 2500명을 포함해 1만 7000명을 대피시켰다”고 밝혔다. CNN은 현지인과 외국인을 비롯해 2만 6500명 넘게 카불을 탈출했다고 전했다. 히잡을 쓰고 탈레반 병사들을 인터뷰했던 미 CNN 방송의 특파원 클라리사 워드(41)도 미 C-17 수송기를 타고 카타르 도하로 빠져나갔다.

탈레반, 여권 찢으며 공항행 차단 

탈레반 관계자는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우리는 외국으로 출국하는 사람들을 막지 않는다”며 “여행할 법적 서류가 없지만 카불 공항 게이트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막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탈레반 병사들이 공항 밖에서 외국 여행허가서나 여권을 찢어버리며 공항으로의 진입을 막고 있다고 폭로하고 있다.

유일한 탈출구인 공항이 막히면서 카불 시내는 불안에 떠는 시민들이 자택에만 머무르며 무거운 적막이 감돌고 있다. 거리에는 화기로 무장한 탈레반 병사들이 배회하고 있다. 집에서 은신 중인 한 아프간 경찰관은 “카불은 공포의 도시가 됐다”고 NYT에 말했다.

문 두드리며 서방 협력자 색출

외신들에 따르면 탈레반은 아프간 정부의 관리나 서방에 협력한 아프간인, 언론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다니고 있다. 앞서 자비훌라 무자히드 탈레반 대변인이 17일(현지시간) 기자회견에서 “전쟁은 끝났다. 전국민을 사면했다”고 한 것과 정반대다. 유엔의 위협평가자문단은 보고서를 통해 탈레반이 미국 및 나토군에 협조한 사람들을 색출하기 위해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고 전했다.

익명을 요청한 한 시민은 로이터통신에 “탈레반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며 “그들의 말은 모두 거짓”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은 “탈레반이 집 근처에 나타나면 온가족들이 화장실로 달려가 숨는다”고 털어놨다.

아프간 서부 헤라트 인근 바기스 지역에서 아프간 정부 관료인 하지 물라 아차크자이 경찰청장이 탈레반에 의해 잔혹하게 처형하는 영상이 SNS에 떠돌고 있다. [트위터 캡처]

아프간 서부 헤라트 인근 바기스 지역에서 아프간 정부 관료인 하지 물라 아차크자이 경찰청장이 탈레반에 의해 잔혹하게 처형하는 영상이 SNS에 떠돌고 있다. [트위터 캡처]

전 경찰 책임자 잔혹한 처형

탈레반이 과거의 공포 정치로 회귀할 것이란 징조는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주말 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아프간 서부 헤라트 인근의 바기스 지역에서 탈레반군이 하지 물라 아차크자이 경찰청장을 잔혹하게 처형하는 영상이 올라왔다. 아차크자이 청장은 탈레반의 표적이 돼 왔다. 영상 속 아차크자이는 눈이 가려진 채 무릎을 꿇린 채로 총살 당한다. 앞서 탈레반은 아프간에서 활동했던 독일 도이체벨레(DW) 기자의 자택을 찾아 친척 한 명을 살해했다.

카불 소재 아프간 국립 박물관 앞에는 탈레반 경비대원이 배치됐다. 탈레반은 과거 통치 시기(1996년~2001년) 6세기의 바미얀 석불 등 세계문화유산을 파괴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국립 박물관의 모하메드 파힘 라히미 소장은 탈레반 측이 “문화 유물을 보호하겠다”며 찾아왔다고 NYT에 전했다. 그러나 탈레반은 우상숭배 금지를 명목으로 과거 국립 박물관의 유물들을 파괴한 적이 있어 유사한 반달리즘(vandalism·문화유산을 훼손하거나 파괴하는 것)이 재현될 수 있다고 문화유산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저항세력 봉기, 바글란주 3곳 탈환

20일(현지시간)에는 탈레반의 아프간 점령 이후 처음으로 반(反)탈레반 저항세력과의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이날 북부 바글란 지역에서 아프간 정부군이 합류한 민병대가 탈레반을 공격해 전투가 벌어졌다고 보도했다. 바글란주 3개 지역은 현재 민병대에 의해 탈환됐다고 한다.

20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북부 바글란 지역에서 아프간 정부군이 주축이 된 민병대가 탈레반을 공격했다. 이들은 ″탈레반 대원 200명을 죽였다″고 주장했다. [트위터 캡처]

20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북부 바글란 지역에서 아프간 정부군이 주축이 된 민병대가 탈레반을 공격했다. 이들은 ″탈레반 대원 200명을 죽였다″고 주장했다. [트위터 캡처]

탈레반의 2인자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가 몇주 안에 새 정부를 구성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정국은 안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아프간 내 소수민족인 타지크 부족을 비롯해 전통적인 탈레반 저항세력인 민족저항전선(북부동맹)은 암룰라 살레 아프간 제1부통령과 합류해 판지시르 계곡에서 병력을 모으고 있다. 아프간 군 장교들을 포함해 7000여명의 병력이 모였다고 한다.

이슬람국가(IS)가 혼란을 틈타 세를 과시할 가능성도 있다. 탈레반과 경쟁 관계인 IS는 일부 대원들이 카불에 이미 입성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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