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족보다 긴 세월을 함께한 동료들과 추억을 찍고 싶습니다.
이십 대 중반에 만나
꽃다운 청춘을 같이하고,
어느새 머리에 흰 눈이 내려앉은 모습을
서로 바라보며 아름다워하고,
가는 세월을 안타까워하며,
서로 사랑하며 기도해 주는 나의 동료들입니다.
우리는 평균 근무 연수가 35년이 넘습니다.
그러고 보니 몇십 년을 하루처럼 만나왔네요.
우리는 호수같이 아름다운 바다를 끼고 있는 부산 송도에 위치한
고신대학교 부속 복음병원, 진단 검사의학과 임상병리사들입니다.
혹시 임상병리사가 뭐 하는 사람들인지 아시나요?
우리 몸에서 샘플링한 모든 것을 검사하는 일을 합니다.
이른바 소변·대변·침· 혈액· 세포 조직 등
우리 몸에서 나는 모든 것들을 검사하는 겁니다.
이 검사로 암, 당뇨는 물론 간 기능, 호르몬,염색체이상 및
병인체감염까지 온갖 증상을 밝혀내죠.
사실 반갑지는 않지만
코로나(COVID19) 진단을 위한 PCR 검사도 임상병리사가 하죠.
이렇듯 환자의 진단과 치료를 위하여
진단 검사의학과의 역할은 병원에서 절대적입니다.
요즘은 분석 기계들이 잘 나와 정말 눈부시게 발전하였지만,
예전에는 모든 것을 1차원적인 수기(manual)로,
액체 시료를 옮기는 Pipetting을 입으로 하며 검사를 하던 시절이었어요.
나이트(야간근무) 할 땐
엠블란스 소리가 얼마나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하던지요.
“병원 주인은 엠블란스 소리가 ‘머니~머니~’로 들리고,
우리는 ‘잉잉~잉잉~ ’으로 들린다는 웃픈 말도 있었지요.
그래도 그땐 얼마나 젊었는지
한숨도 못 잔 퇴근길에도 조조 영화를 보곤 했죠.
그 시절 어떻게 그렇게 잘 어울렸는지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네요.
각자 결혼하고 가정을 꾸려도 우리는 한결같은 동료였습니다.
시부모님 모시고, 진단 검사 일하고,
전공 공부하며, 게다가 아이들까지 키우면서
오늘에까지 왔네요.
지나고 보니 원더우먼은 바로 우리였습니다!
저는 올 12월에 35년 9개월 일하고 정년을 맞이합니다.
그렇게도 흐르지 않을듯한 세월이 어느새 훅 가서
이젠 한 사람씩 이 추억의 삶터를 떠나게 되네요.
지난해같이 하던 이옥자 선생이 건강상의 이유로 명퇴하면서
헤어지는 진한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올해 저 또한 정년을 앞두고 있으니
우리와 같이했던 시절,
지금은 잊히는 것에 대하여 익숙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누군가의 마음에서,
어딘가의 공간에서,
서서히 잊힐 것을 생각하니
아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슬픈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행복합니다!
이곳에서 많은 동료들로부터 수십 년 받은 은혜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나와 추억을 같이할 동료들 이름은 이옥자 ,정정해 , 박준자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들보다 아주 조금 나이가 더 많은 큰 언니 김유화입니다.
35년 동고동락한 저희의 삶을 사진으로 기록해 주지 않으시렵니까?
김유화 드림
먼저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 “35년 세월 함께 했다는 데
그렇다면 대체 몇 살 때부터 함께 하신 겁니까?”
“저는 스물여섯요.” 김유화 선생이 먼저 말했습니다.
“저는 스물넷”
“저는 스물셋”
“저는 스물둘”
김유화 선생 답이 끝나자마자 동시에 들려온 답입니다.
- “아니 이 정도면 누구 집에 숟가락 몇 개인지도 알겠네요?”
박준자 선생이 얼른 답했습니다.
- “두말하면 잔소리죠.
과거,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까지도 알아요.”
- “미래요? 그렇다면 김유화 선생은 12월 이후에 어떻게 사실까요?
- “경기도 어드메서 텃밭 가꾸며 사실 겁니다.”
고개 돌려 김유화 선생에게 답이 맞는지 물었습니다.
- “하하, 맞아요. 애들이 다 그쪽에서 살아요.
그래서 저도 애들 옆에서 살려고 올라갈 겁니다.”
하긴 그렇습니다.
그 긴 세월,
넷은 각자 남편들보다 더 오래 함께했다고 하니
속속들이 서로를 다 아는 겁니다.
사진은 그들의 발길이 밴 곳에서
두루두루 찍기로 했습니다.
우선 진단검사학과, 복도, 병원 입구, 교회, 옥상, 장기려 박사기념 벽 등
무수히 다녔을 장소와
온 마음을 준 공간에서 그들의 추억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사진 촬영이 끝날 무렵
그들이 희한한 주문을 제게 했습니다.
- “근무복, 가운 말고 일상복으로도 한장 찍어 주시면 안 될까요?”
“네, 찍어드리죠”라고 냉큼 답했지만, 속으론 의아했습니다.
35년 근무한 병원에서 일상복으로 찍어 달라니
아무래도 의아했던 겁니다.
옷을 갈아입고 온 그들을 보며 빙그레 웃음이 났습니다.
모두 맞춤옷을 입고 손에 꽃을 들고 나타난 겁니다.
- “사진을 찍으려고 일부러 옷을 맞추신 겁니까?”
- “당연하죠.”
- “어디서 이리 이쁜 옷을…?”
- “박준자 선생 시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신 겁니다.”
- “아니 시어머님이 어떻게?”
- “박준자 선생과 우리가 얼마나 잘했으면 옷까지 만들어 주셨겠어요.”
이 말끝에 모두 환하게 웃었습니다.
박준자 선생 시어머니께서 만들어 준 옷을 입고
이날의 사진 촬영을 마무리했습니다.
장비를 정리하려는 순간,
김유화 선생을 뺀 모든 선생이
다시 한장만 더 찍어 달라고 했습니다.
- “김유화 선생에게
우리가 꽃을 드리는 장면을 찍어주시면 안 될까요?”
그들이 마지막으로 한장 더 찍어달라고 한 것은
떠나야 하는 김유화 선생을 위한
그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중앙일보 새 디지털 서비스 ‘인생 사진 찍어드립니다’
무더운 8월입니다.
아무리 무더워도 여러분의 소중한 사연을 찾아갑니다.
어떠한 사연도 좋습니다.
소소한 사연이라도 귀하게 모시겠습니다.
가족사진 한장 없는 가족,
우정을 쌓은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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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차 마감: 8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