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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팔 잘라달라"···안락사 고백했던 CRPS환자의 반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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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태씨는 오른팔에 팔찌를 여러개 끼고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주황색 팔찌는 CRPS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한 상징 팔찌라고 한다. 김씨의 왼손은 사계절 내내 장갑으로 감싸져 있다. 우상조 기자

김경태씨는 오른팔에 팔찌를 여러개 끼고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주황색 팔찌는 CRPS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한 상징 팔찌라고 한다. 김씨의 왼손은 사계절 내내 장갑으로 감싸져 있다. 우상조 기자

김경태(41)씨는 계절에 상관없이 항상 왼팔을 무언가로 감싸야 한다. 한여름에도 긴 팔을 입고 왼손에는 장갑을 착용한다. 희귀난치성질환 CRPS(복합부위 통증 증후군)가 그를 보통 사람과 다르게 만들었다. 어딘가에 스치기만 해도 ‘팔팔 끓는 물을 들이붓는 듯한’ 통증이 왼팔에 느껴진다. 하루에 모두 16알의 약을 먹는다. 마약성 진통제부터 항우울제까지…. 김씨는 “약을 간식 먹듯 먹는다”고 했다.

CRPS는 외상 후 특정 부위에 발생하는 신경병성 만성 통증 질환이다. 통증을 0~10점으로 수치화한 NRS(Numeric Rating Scale) 기준으로 CRPS 통증은 10점이라고 한다. 통상 출산의 고통을 7점으로 본다.

‘털팔이’에서 ‘외톨이’로

김경태씨는 서울 구로구에 위치한 에듀윌 본사에서 기자를 만났다. 그가 1년만에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의미있는 학원이기 때문이다. 김씨는 “에듀윌 교수님과 병원 교수님들이 없었다면 저는 합격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우상조 기자

김경태씨는 서울 구로구에 위치한 에듀윌 본사에서 기자를 만났다. 그가 1년만에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의미있는 학원이기 때문이다. 김씨는 “에듀윌 교수님과 병원 교수님들이 없었다면 저는 합격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우상조 기자

자동차 검사원으로 일하던 지난 2013년, 김씨는 평소와 같이 자전거로 출근길에 올랐다. 그는 “5월 31일 오전 7시 42분이었다”며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김씨는 “자전거의 핸들이 부러지면서 왼쪽 팔에 외상을 입었는데 일반 근육통이 아니라 면도칼로 베는 듯한 통증이었다”며 “큰 병원에 가니 CRPS로 최종 진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사고 이후 김씨의 삶은 ‘털팔이’(붙임성이 있고 행동이 활발한 사람이라는 뜻의 대구 사투리)에서 ‘외톨이’로 180도 달라졌다. 김씨는 “덜렁대고 사람 좋아하고 노는 거 좋아해서 털팔이라는 별명도 있었는데 이제는 외로운 게 일상이 돼 혼자인 게 아무렇지 않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부모님과 함께 살지만, 여름에도 방문을 닫고 생활한다고 한다. “부모님께 아픈 모습을 보여드리기도 싫고 계속되는 통증에 곁에 누가 있는 게 더 신경 쓰인다”는 이유에서다.

“사람들은 꾀병이라 보기도…차라리 팔 잘라달라”

지난 2019년 KBS 〈무엇이든 물어보살〉에 출연한 김경태씨. '죽음의 고통 CRPS 환자, 안락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는 문구로 소개됐다. 유튜브 'KBS N' 캡처

지난 2019년 KBS 〈무엇이든 물어보살〉에 출연한 김경태씨. '죽음의 고통 CRPS 환자, 안락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는 문구로 소개됐다. 유튜브 'KBS N' 캡처

그의 고통을 아무도 알아주지 못했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지난 2019년 한 방송사 문을 두드렸다고 한다. 고민을 들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방송에서 김씨는 “칼로 베이는듯한 고통에 기절을 하다 보니 팔을 그냥 잘라달라 했는데 법적으로 안 된다더라”며 “극심한 고통에 안락사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가족은 저를 꾀병 부리고 핑계로 집에서 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당시 방송인 서장훈씨는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생각을 했겠냐만서도 나이도 젊은데 벌써 그런 생각하지 말라”고 조언했고, 이수근씨는 “양손을 최대한 덜 쓸 수 있는 개인 사업을 하라”고 조언했다.

“아침엔 공부, 오후엔 병원…삶 개척 중”

김경태씨는 “경북대학교병원 신경과 이종목 교수님이랑 대구 달서구 상인동에 있는 한 정신건강의학과 장병구 원장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가 들고 있는 건 공인중개사 시험을 공부했을 때 썼던 교재. 우상조 기자

김경태씨는 “경북대학교병원 신경과 이종목 교수님이랑 대구 달서구 상인동에 있는 한 정신건강의학과 장병구 원장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가 들고 있는 건 공인중개사 시험을 공부했을 때 썼던 교재. 우상조 기자

그 후 김씨는 통증 속에서도 삶을 개척하기로 했다. 지난해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해 현재 창업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올해는 드론 자격증과 PPT, 엑셀 등 정보기술자격증도 취득했다. 그는 “매물을 입체적으로 찍어 고객들한테 더 나은 중개를 하기 위해서다”라고 설명했다. “직원은 경력 단절된 여성분들이나 저소득층 가구 또는 장애인분들 중 부동산에 관심 있는 분들과 함께 일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1년 만에 합격할 수 있었던 건 든든한 조력자들 덕분이었다. 김씨는 “의사 선생님들은 제가 공부를 잘할 수 있도록 통증과 멘탈 관리도 세밀하게 해주시고, 본인의 공부 비법도 전수해줬다”며 “오전에는 학원에서 수업 듣고 오후에는 병원을 갔다”고 말했다. 원래 머리가 좋았던 게 아니냐는 질문에는 “중학교 때 영어가 8점, 수학이 12점이었다. 고등학교는 중퇴했다”며 “학원과 의사 선생님들이 안 계셨다면 절대 못 이뤄냈을 일이다. 그래서 전 운이 참 좋다”고 했다.

“CRPS의 심각성 우리나라도 알았으면…”

김씨는 실제로 안락사 방법을 알아봤다고 한다. 현재 스위스의 한 비영리단체에서 안락사 절차를 밟고 있다. 이 단체의 가입 조건은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씨는 7개월이 걸린 끝에 지난 4월 정식 회원이 됐다고 한다.

처음엔 통증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주된 목적이 바뀌었다. 김씨는 “이 단체에서 저를 무료 회원으로 받아준 것 자체가 국제사회에서 CRPS를 심각한 병으로 보고, 제 어려운 사정도 인정한다는 의미”라며 “우리나라에서는 국제사회의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난 4월 ‘장애인복지법 시행령’ 개정안이 의결되면서 CRPS도 ‘장애’로 인정받게 됐다. 그러나 단순히 통증이 심한 상태만으로는 장애 판정을 받을 수 없다. ‘CRPS를 진단받은 뒤 2년 이상의 충분한 치료에도 불구하고 근 위축 및 관절구축 등이 뚜렷하거나 신경 손상으로 팔 또는 다리 전체에 마비가 있는 경우’로 제한을 뒀기 때문이다.

환자의 장애판정은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가 하도록 규정됐다. 문지연 서울대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는 “CRPS의 경우 겉으로 봐서는 ‘장애’라고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에 진단이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한통증학회에서 곧 열릴 워크숍을 통해 이에 대한 조금 더 논의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아파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보여주고 싶어”

대구에서 5시간을 운전해 기자를 만나러 온 김경태씨는 "CRPS 환우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한다"며 "제가 이렇게 버티고 어떻게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다른 환우분들도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우상조 기자

대구에서 5시간을 운전해 기자를 만나러 온 김경태씨는 "CRPS 환우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한다"며 "제가 이렇게 버티고 어떻게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다른 환우분들도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우상조 기자

김씨는 “CRPS 특성상 일반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해 병원 치료비가 부담돼서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고 했다. 그는 “환우들의 통증 완화 시스템을 잘 구축하고 장애인으로 인정받아 특별 채용 등으로 생계 활동이라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최근에 저랑 자주 연락하던 분이 갑자기 연락이 안 된다”며 “번호도 착신 거부됐는데 마음이 너무 아프고 걱정된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렇게 아파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걸 다른 환우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자신을 살리고, 환우들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말로 ‘우리 열심히 삽시다’라고 하는 것보다 제가 몸으로, 행동으로 실천해나가다 보면 환우들이 절 보고 극단적인 선택만은 피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열심히 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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