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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예수뎐]다빈치 ‘최후의 만찬’에서 누가 소금통 쏟았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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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호의 예수뎐]

경북 안동은 간고등어로 유명하다. 고등어가 잡히는 영덕 바닷가에서 안동까지는 무려 80킬로미터다. 냉장 시설이 없던 시절, 생고등어는 내륙까지 가져가다가 썩기 일쑤였다. 보부상들이 나귀나 달구지에 봇짐을 싣고 하루 종일 걸으면 해질녘에 임동 장터에 닿는다. 안동에서 동쪽으로 2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이다. 상인들은 임동 장터에서 고등어에 소금을 뿌렸다. 임동 장터에는 간고등어를 사려는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 소금에 절여져 숙성된 고등어는 더 깊은 맛을 냈다.

⑭다빈치 ‘최후의 만찬’에서 누가 소금통 쏟았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최후의 만찬'에는 예수의 제자인 유다가 소금통을 쏟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거기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중앙포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최후의 만찬'에는 예수의 제자인 유다가 소금통을 쏟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거기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중앙포토]

유대인들은 40~50도를 넘나드는 사막 기후에서 살아야 했다. 그들에게 소금은 목숨 같은 것이었다. 맛을 내는 건 기본이요, 음식을 저장하고 보존하는 데 필수였다. 소금에 절여야 음식이 썩지 않았고 오래 저장해둘 수 있었다. 구약에는 이런 대목도 나온다.

“너희가 곡식 제물로 바치는 모든 예물에는 소금을 쳐야 한다. 너희가 바치는 곡식 제물에 너희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소금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 너희의 모든 예물과 함께 소금도 바쳐야 한다.”(레위기 2장 13절)

그만큼 소금은 각별한 것이었다. 신에게 바치는 곡식에도 소금을 뿌려야 했고, 제물과 함께 소금도 바쳐야 했다.

숙소에서 일찍 나와 갈릴리 호수로 해돋이를 보러 갔다. 오전 다섯 시 사십 분쯤 호숫가로 나갔다. 이렇게 어스름이 질 무렵 예수도 호숫가를 거닐지 않았을까. 만물이 잠들었을 때 예수는 홀로 일어나 종종 기도를 했다고 한다. 아직 해가 오르지 않아 약간 어둑했다. 대신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호숫가 산책로에서 조깅하는 사람도 더러 보였다. 예수는 갈릴리 호 주변 어딘가에서 ‘소금’을 예로 들며 설교를 했다. 그 유명한 ‘빛과 소금’ 일화다.

갈릴리 호수 건너편에 있는 골란 고원 너머에서 동이 틔고 있다. 해 뜰 무렵의 갈릴리 호수는 무척 아름답다.

갈릴리 호수 건너편에 있는 골란 고원 너머에서 동이 틔고 있다. 해 뜰 무렵의 갈릴리 호수는 무척 아름답다.

예수는 말했다.

“모두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가복음 9장 49~50절)

마태복음에는 이렇게 표현돼 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복음 5장 13절)

예수는 ‘짠맛’을 역설한다. 그걸 잃지 말라고,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사람들은 이 대목을 단순하게 풀어낸다. 소금처럼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일까. 예수가 말한 ‘소금’이란 무엇이며, ‘짠맛을 잃은 소금’은 또 무엇일까.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릴 때 ‘짠맛을 잃은 소금’이 되는 걸까. 또 예수는 왜 자신의 주머니가 아니라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라”라고 했을까.

예수는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라고 했다. 나는 이 말씀을 두고 ‘김장하는 광경’이 떠올랐다. 배춧잎은 처음에는 빳빳하다. 그걸 배추의 고집, 배추의 에고라고 불러보자. 그런데 소금과 만나는 순간 배춧잎은 풀이 죽는다. 왜 그럴까. 배추의 고집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렘브란트가 그린 예수의 초상. 렘브란트는 유대인 마을에 가서 오랜 세월 머물며 유대인의 전형적인 관찰한 뒤 예수의 초상화를 그렸다.

렘브란트가 그린 예수의 초상. 렘브란트는 유대인 마을에 가서 오랜 세월 머물며 유대인의 전형적인 관찰한 뒤 예수의 초상화를 그렸다.

위에서 본 것처럼 마가복음에서는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라고 했다. 왜 ‘불 소금’일까. 그리스어 성경에는 ‘en puri(in fire)’로 표현돼 있다. ‘불 속에서 소금에 절여지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왜 ‘불’일까. 내가 녹아내리기 때문이다. 소금과 만나는 순간 에고는 녹기 시작한다. 이를 통해 자신이 열린다. 그 틈으로 소금이 스며든다. 배추 안에 소금이 거하고, 소금 안에 배추가 거한다. 그것이 ‘절여짐(Being salted)’이다.

절여진 배추는 달라진다. 한여름 뙤약볕에도 쉽게 상하지 않는다. 하루 이틀 지난다고 변하지도 않는다. ‘짠맛’ 때문이다. ‘짠맛’을 품으면 성질이 바뀐다. 세상의 파도에 흔들리지 않고,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 그게 바로 짠맛의 속성이다. 부동성(不動性)과 영원성. 다시 말해 신의 속성이다. 신의 속성은 흔들림이 없고 영원하다. 예수는 그걸 잃지 말라고 했다.

2000년 전에도 예수는 행여 우리가 ‘짠맛’을 잃을까 봐 걱정했다. “아무리 네가 ‘세상의 소금’을 자처해도, 네 안에 ‘짠맛’이 없다면 어쩔 것이냐. ‘신의 속성’이 없다면 어쩔 것이냐. 어디에 가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너희 마음에 ‘하느님의 속성’을 품어라. 그리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예수의 메시지는 이러했다.

예수와 열 두 제자들이 함께 최후의 만찬을 했다고 전해지는 장소다. 예루살렘 성에서 그리 멀지 않다.

예수와 열 두 제자들이 함께 최후의 만찬을 했다고 전해지는 장소다. 예루살렘 성에서 그리 멀지 않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에도 소금 코드가 등장한다. 유월절을 맞은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사를 했다. 다빈치는 그 광경을 작품으로 남겼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수도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고 하자 제자들이 화들짝 놀라는 장면이다. 비립(오른쪽에서 네 번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을 가리키며 “주님, 설마 그 사람이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되묻는다. 다혈질이었다는 베드로(왼쪽에서 다섯 번째 머리)는 빵을 자르던 나이프를 든 채 예수를 향해 몸을 기댄다.

예수를 배반하는 가룟 유다(왼쪽에서 네 번째 머리)는 진한 갈색 수염을 하고 있다. 그는 유대 제사장에게 은화 서른 닢을 받고 예수를 팔아넘겼다. 그림 속 유다는 오른손에 은화 주머니를 쥐고 있다. 그리고 그의 오른쪽 소매 앞에는 조그만 통이 하나 넘어져 있다. 그게 소금 통이다. 유다는 팔로 소금 통을 쳐서 넘어뜨렸다. 그리하여 식탁 위에는 소금이 쏟아져 있다. 식탁 위에 흩어져 반짝이는 소금. 이는 유다가 ‘신의 속성’을 쏟아버렸음을 뜻한다. 이미 자신의 마음에서 ‘짠맛’을 잃어버렸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예수를 팔아넘기고 받은 돈주머니를 쥐고 있는 유다가 오른팔로 소금통을 쏟았다. 이 장면에서 소금이 상징하는 의미가 있다.

예수를 팔아넘기고 받은 돈주머니를 쥐고 있는 유다가 오른팔로 소금통을 쏟았다. 이 장면에서 소금이 상징하는 의미가 있다.

호숫가를 걷다가 벤치에 앉았다. 해 뜨기 직전의 갈릴리는 고요했다. 내 안의 소금 통, 우리 안의 소금 통에는 무엇이 있을까. 거기에는 소금이 담겨 있을까 아니면 텅 비어 있을까. 소금이 담겨 있다면 짠맛이 날까. 행여 지지고 볶는 일상에서 우리는 수시로 소금을 쏟아버리는 건 아닐까. 그렇게 우리도 예수를 배반하고 있는 건 아닐까…….

〈15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짧은 생각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구시가지에는 예루살렘 성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신성시하는 통곡의 벽이 있고, 무슬림들이 신성시하는 무함마드의 성지도 있습니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직전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는 ‘최후의 만찬’ 장소 말입니다.

건물은 상당히 근사하더군요. 위치도 예루살렘 성에서 가까워 요지에 속합니다. 2000년 전에도 그랬을 겁니다. 예루살렘 성에서 멀지 않은 이곳의 땅값은 아주 비쌌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떻게 이곳에서 최후의 만찬을 할 수 있었을까요. 당시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리 돈이 많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누군가 빌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식사를 할 곳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 하인을 부릴만큼 재력이 있는 유대인이 자신의 집을 빌려준 겁니다.

가끔 생각해봅니다. 재력이 상당히 괜찮았을 그 유대인은 왜 예수와 제자 일행에게 집을 빌려주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어떤 이유인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에 대한 직접적 기록이 없으니까요. 대신 저는 추측해봅니다. 아마도 그 유대인은 예수님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면 집을 빌려주진 않았을 테니까요.

길을 가다가 공터에서 설교하고 있는 예수를 봤을 수도 있고, 간음한 여자를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죄 없는 이가 돌을 던지라”고 말하는 장면을 봤을 수도 있고, 시장에서 예수가 사람들에게 하는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직접 예수를 찾아가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고 해결법을 찾았을 수도 있습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예수는 헐벗고, 병들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만 일을 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만 하늘의 메시지를 전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사회적 약자의 구세주로 보기도 합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지요. 예수님은 정말 사회적 약자만을 위한 구세주였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하느님은 악인이든 선인이든 똑같이 해를 비추신다.” 이건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악인이든 선인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이든, 사회적 약자이든 권력자이든 가리지 않고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을까요. 왜냐하면 그 모든 사람이 결국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삶에는 필연적으로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누구도 이걸 비켜갈 수는 없습니다. 제아무리  최고의 권력자, 최고의 갑부라 해도 말입니다. 희로애락의 파도 앞에서 인간은 휘청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위해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삶의 파도 앞에서 휘청거리는 사람들. 그들에게 하늘의 메시지를 전한 겁니다. 설령 그들이 유대의 제사장이거나 최고의 권력자, 아니면 예루살렘 최고의 갑부라 해도 말입니다. 예수에게는 그저 ‘문제를 가진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사회적 약자만을 위한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작은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인간을 위한 예수였습니다. 모두를 위한 예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최후의 만찬장, 그 공간에 서서 저는 그걸 묵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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