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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있는 삶' 이런 카피 없나···섹시 고집하다 당한 與주자들

중앙일보

입력

더불어민주당 대선 주자 이낙연 전 대표가 발표한 중산층경제 성장 전략 '삼중폭격론'

더불어민주당 대선 주자 이낙연 전 대표가 발표한 중산층경제 성장 전략 '삼중폭격론'

지난 16일 더불어민주당 대선 주자 이낙연 전 대표 캠프에선 심야까지 참모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다음 날 발표할 경제 성장 전략의 이름을 뭘로 붙일 것인지를 두고서다. 그래서 찾은 게 ‘3중 폭격론(정밀·선제·전방위 폭격)’. 이낙연 캠프 한 관계자는 “그동안 발표한 신복지, 중산층 경제 등 정책명이 밋밋해 대중에게 소구되지 못한 거 같아 선명한 표현을 찾으려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반응은 신통찮았다. 익명을 요청한 정치 컨설턴트 A씨는 “전쟁 용어가 이낙연 후보와 어울리지 않고 경제 성장 정책에 폭격도 부적절하다”며 “장고 끝에 악수가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주자 정세균 전 국무총리가 발표한 주택 공급 정책 '학품아(학교를 품은 아파트)'를 비꼰 인터넷 합성사진.

더불어민주당 대선 주자 정세균 전 국무총리가 발표한 주택 공급 정책 '학품아(학교를 품은 아파트)'를 비꼰 인터넷 합성사진.

정세균 전 국무총리가 직접 만들었다는 정책명 ‘학품아(학교를 품은 아파트)’는 SNS에서 MZ세대들에게 회자됐다. 그러나 긍정적 반응은 아니었다. ‘학품아’는 주택 공급 방법 중 하나로 국·공립 학교 위에 아파트를 증축하는 프로젝트성 정책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를 풍자하는 합성사진이 삽시간에 퍼졌다. ‘마이 데이터’와 ‘마이 서비스’를 결합한 맞춤형 복지 서비스 ‘마이마이 복지’에 대해선 “다음 정책은 ‘워크맨(일본 소니의 카세트 플레이어)’이냐”는 댓글이 달렸다. ‘마이마이’는 ‘워크맨’이 유행하자 삼성전자가 1981년 내놓은 국산 카세트 플레이어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주자 정세균 전 국무총리의 '마이마이 복지' 홍보 자료

더불어민주당 대선 주자 정세균 전 국무총리의 '마이마이 복지' 홍보 자료

선거 캠페인 전문가들은 “민주당 대선 주자 중 그나마 브랜드 파워를 갖게 된 건 이재명 경기지사의 ‘기본 시리즈’”라고 평가한다. 여권에서 오래 활동한 정치 컨설턴트 B씨는 ‘이재명 하면 기본소득, 윤석열 하면 정권교체가 떠오르는데 다른 후보들은 아직 그게 없다”며 “하지만 기본 시리즈는 경제 정책에 국한돼 있어서 외교, 국방 등 다른 분야로 용도를 확장하긴 어려운 브랜드”라고 말했다.

섹시한 문구보다 사람들 마음 속에 있는 것

한 번만 듣고도 기억에 남는 슬로건이나 정책명을 만드는 건 모든 선거 캠프의 핵심 난제다. 전문가들은 잘 만든 슬로건의 대표적 사례로 2012년 18대 대선 민주통합당 경선에 출마한 손학규 전 대표의 ‘저녁이 있는 삶’을 꼽곤 한다. 서정적 작명으로 노동계의 투쟁 목표였던 노동시간 단축을 제도권의 정책 논의로 무리 없이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경선 승리가 유력했던 문재인 후보는 한 TV토론회에서 손 전 대표에게 “내가 후보로 결정되면 ‘저녁이 있는 삶’을 빌려 줄 수 있냐”고 묻기도 했다. 이를 창작한 김계환 당시 메시지 담당 비서관은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과로에 지친 한국 사회에서 대다수 국민들이 느끼고 있는 문제를 쉽게 표현한 게 많은 공감을 받았다”며 “핵심은 레토릭이 아닌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담는 것”이라고 말했다.

손학규 전 대표의 2012년 대선 경선 후보 홍보 자료

손학규 전 대표의 2012년 대선 경선 후보 홍보 자료

18대 대선 때 박근혜 캠프에서 메시지를 담당한 한 인사는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많은 선거 캠프가 독특하고 섹시한 문구가 필요하다고 착각하는데 이게 최악의 선택”이라고 말했다. 그는 “새롭고 특별한 것을 찾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국민의 마음 속에 있는 걸 못 찾는다”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을 후보 자기의 언어로 소화할 때 메시지에 생명력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대정신 빠진 與 대선 경선 메시지

김형준 명지대 정치외교학 교수는 “이번 여당 대선 경선에서 시대정신을 담은 슬로건이나 정책명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이재명 지사의 기본소득, 이낙연 전 대표의 신복지 등은 정책 과제이지 시대정신을 담은 국가 비전이 아니다”며 “김두관 의원의 ‘서울공화국 해체’, ‘지방도 잘 사는 나라’ 정도가 시대정신을 담으려는 노력”이라고 평가했다.

지난 정부의 브랜드 정책·슬로건.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지난 정부의 브랜드 정책·슬로건.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18, 19대 대선 문재인 캠프에서 메시지를 담당했던 한 민주당 보좌관은 “이재명 지사의 기본소득은 돈을 나눠주는 장면을 연상시키고, ‘저녁이 있는 삶’은 정시 퇴근 해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그려지는데, 이낙연 전 대표의 신복지는 아무 것도 안 떠오르는 게 큰 차이”라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청한 정치 컨설턴트 C씨는 “박용진 의원이 제안한 ‘888 사회(8시간 일하고, 8시간 취미 활동을 하고, 8시간 잠을 자는 사회)’, ‘국민자산 5억원 성공시대’는 이명박 대통령의 ‘747 공약’, ‘국민성공시대’와 문법이 유사하다”며 “가장 젊은 후보인 박 의원이 기존 정치권의 문법을 답습하면서 자신의 정책을 아우르며 세대교체의 필요성을 호소할 브랜드 개발에 실패했다”고 꼬집었다.

김형준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의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더 완벽한 통합(a more perfect union)’ 처럼 현재의 문제와 미래의 대안을 아우르는 슬로건이 있어야 선거에서 부동층을 움직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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