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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김일과 이노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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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본 프로레슬링의 영웅 안토니오 이노키는 1960년 데뷔전을 치렀다. 상대는 오키 긴타로(大木金太郞). 지난주 세상을 떠난 김일이 일본에서 사용한 링 네임이다. 이노키는 김일의 팔꺾기 기술에 걸려 7분6초 만에 패했다.

이후 두 사람은 수없이 링 위에서 맞붙었다. 일본 측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만도 38차례다. 전적은 9승1패28무로 김일이 앞선다. 무승부는 대부분 시간 초과. 그만큼 치열하고 처절한 승부를 펼쳤다는 얘기다.

링 밖에서 둘은 끈끈한 의리와 정으로 맺어진 관계였다. 나이는 김일이 열네 살 위였지만 역도산 도장 입문은 1년 차이에 불과했다. 브라질 이민 출신인 이노키에게 건넨 김일의 첫인사는 이랬다. "난 한국인이고 넌 브라질서 왔으니 잘 지내보자." 역도산의 조련은 가혹했다. 애제자일수록 얻어맞거나 매트 위에 메다꽂히는 횟수가 많았다. 이노키가 두들겨 맞는 날이면 늘 김일이 불고기 집으로 데려가 달랬다.

63년 역도산의 비명횡사 이후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간다. 역도산과 달리 한국인임을 숨기지 않았던 김일은 일본 레슬링의 적통(嫡統)을 이어받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것은 이노키와 자이언트 바바의 몫이었다. 대신 김일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 무대를 넓혔다.

이노키는 링 밖에서도 성공을 거뒀다. 현역 시절인 89년 '스포츠 평화당'을 만들고 국회의원이 됐다. 90년 걸프전 발발 직전엔 이라크에 달려가 흥행을 펼치고 사담 후세인을 만나 일본인 인질 석방에 큰 역할을 했다. 북한에서도 이노키는 국빈 대접이다. 함경남도 출신인 역도산의 직계 제자로 인정해 주기 때문이다. 그는 16차례 방북했고 대규모 격투기 대회도 개최했다.

지금도 이노키는 '투혼'의 상징으로 받들어진다. 연초 TV 방송에는 이노키가 솥뚜껑만 한 손으로 출연자들의 뺨을 때리는 모습이 곧잘 나온다. 이른바 '투혼 주입'이다. 한 해의 액운을 날려 보낸다는 의미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영웅 김일의 만년은 불우했다. 열렬 팬인 한 의사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더 빨리 세상을 뜰 뻔했다. 영웅을 만들고 떠받들기에 인색한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는 듯해 씁쓸하다. 그러고 보니 이노키와 '세기의 대결'을 펼쳤던 프로복서 무하마드 알리도 펀치 세례의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이 '박치기 병'을 앓았던 김일과 겹친다. 이노키를 매개로 한 기묘한 인연이란 생각이 든다. 다시 한번 김일 선수의 명복을 빈다.

예영준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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