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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했던 시대 … 박치기 한 방에 울고 웃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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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1960~70년대 한국 프로레슬링계를 주름잡았던 '박치기왕' 김일 씨가 26일 낮 12시17분 서울 하계동 을지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77세. 병원 측은 "25일 새벽에 혈압이 급격히 떨어져 중환자실로 옮겼으나 결국 회복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당뇨에 고혈압, 하지 부종, 신부전증 등 각종 질환을 앓았던 고인의 최종 사망원인은 만성신부전증과 심장 혈관 이상으로 인한 심장마비. 아들 수안(56)씨와 첫째 딸 애자(61)씨, 둘째 딸 순희(59)씨, 제자인 이왕표 한국프로레슬링연맹 회장 등 30여 명이 임종을 지켜봤다.

빈소는 을지병원 장례식장 지하 1층 특실에 마련됐고 28일 오후 경기도 벽제에서 화장을 한 뒤 유골은 고향인 전남 고흥에 안치될 예정이다.

고인은 국내 스포츠 스타가 거의 없다시피 하던 60년대 국민적 영웅이었다.

프로레슬링이 벌어지는 날이면 만화 가게와 다방은 레슬링 중계를 보려는 손님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다방들은 '오늘 김일 레슬링'이란 간판을 세워놓고 손님을 끌었고, 만화 가게에서는 만화를 보던 꼬마 손님들을 다 내보낸 뒤 다시 TV 손님을 받았다.

TV 앞에 모인 사람들은 호랑이에 삿갓과 곰방대가 그려진 가운을 입은 '박치기왕' 김일에 열광했다. 손에 땀을 쥐고 TV를 보던 사람들은 김일 선수가 상대의 반칙에 피를 흘리면 "박치기" "박치기"를 외쳤고, 김일이 박치기로 상대를 쓰러뜨리는 순간 환호했다. 당시 프로레슬링은 축구.권투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국민의 사랑을 받는 인기 스포츠였고, 김일 선수는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100달러에 불과했던 당시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준 스포츠 영웅이었다.

1929년 전남 고흥군 거금도에서 태어난 김씨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구(1m80cm)를 자랑하며 호남 씨름왕으로 이름을 날렸다. 56년 여수에서 선원들에게 "일본 레슬링 영웅 역도산은 조선인이다"라는 말을 듣고 역도산의 제자가 되기 위해 56년 11월 밀항선을 타고 대한해협을 건넜다. 경찰에 잡혀 1년간 형무소 생활을 했지만 역도산의 보증으로 나와 57년 10월 역도산 문하생이 됐다.

박치기와 가라테촙을 연마한 김씨는 63년 스승 역도산이 괴한의 흉기에 찔려 숨지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그해 12월 세계헤비급 챔피언에 올랐다. 김씨는 80년 은퇴할 때까지 3000여 회 경기를 치렀고, 세계타이틀을 20차례 방어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 은퇴한 김씨의 말년은 평탄치 못했다. 87년 아내를 백혈병으로 떠나보냈고, 레슬링 후유증과 함께 사업실패로 인한 스트레스로 92년 12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1년간 일본 후원자의 도움으로 일본 후쿠오카에서 외롭게 병마와 싸우다가 94년 2월 초 삼중 스님과 박준영 을지병원 이사장의 권유로 국내로 건너와 현재까지 을지병원에서 무료로 치료를 받아왔다. 지난달 10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경기에 특별 시구자로 나서 휠체어를 탄 채 공을 던졌고 이것이 팬들 앞에 선 그의 마지막 무대가 됐다.

성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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