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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35호실’ 간첩 정경학 암약 10년

중앙일보

입력

월간중앙지난 8월22일 국가정보원은 북한 직파간첩 정경학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9년 만에 처음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간첩일까? 인터넷 ‘구글 어스’로 청와대 앞 가로수까지 확인할 수 있는 시대에 말이다.

한 공작원 ‘정 선생’이 태국인 신분을 세탁해 한국에 출입했다.”

1999년 8월 국가정보원이 한 해외 귀순자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흘러나온 한마디였다. 그러나 이 한마디에 국정원 대공수사과 관계자들의 귀가 번쩍 트였다. 암약 10년 만에 검거된 직파간첩 정경학의 꼬리는 이렇게 드러나게 됐다.

그 후 장장 7년간 ‘정 선생’을 추적한 끝에 국정원은 지난 7월31일 서울 성북구 보문동 소재 B호텔 로비에서 막 체크아웃하려는 정경학(48)을 체포했다. 그는 이날 인천공항을 통해 출국하려던 참이었다.

정경학은 수사 과정에서 “전시 정밀 타격을 위한 좌표 확인을 위해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면서 망원렌즈로 울진원자력발전소 사진을 찍어 북한으로 보냈다”고 진술했다. 대공 관련자들의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발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정경학은 검찰 수사에서 1996년 3월5일 “‘모사드’와 같은 작고 단단한 조직을 만들라”는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기존의 ‘대외정보조사부’를 ‘35호실’로 이름을 바꾸고 주로 제3국을 경유하는 공작원들을 특별 관리해 왔다”고도 밝혔다. 그에 따르면 35호실은 이스라엘 첩보 조직 모사드를 모방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보도를 접한 국민의 반응은 한마디로 “요즘 세상에 웬 간첩?”이었다. 워낙 뜬금없는 이야기였던 터다. ‘직파간첩’이라는 용어도 생소했다. 그뿐만 아니라 간첩이 내려와 기껏 했다는 일이 다 공개된 원자력발전소 사진을 찍는 일이었다는 것도 황당했다.

그동안 사라졌던 간첩이 왜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 아니면 그동안 간첩을 안 잡았거나 못 잡았던 것일까? 도대체 요즘 간첩은 무슨 일을 하는 것일까?

국회 정보통신위원회를 통해 알려진 정경학 사건의 전모는 다음과 같다.

1958년 함경남도 함주군 함주읍 출신인 정경학은 김일성종합대학 영문과와 군관 양성기관인 김일성정치대학 연구원과정 및 전문 공작원 양성기관인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나온 엘리트다. 정경학은 영어·중국어·태국어 등 수개 국어를 구사하며, 해외에서 상부선과 통신연락을 할 때는 영문 음어를 만들어 사용했다.
평범한 엘리트로 일생을 살 수 있었던 그가 공작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대학 2학년 때인 1976년 9월. 조선인민군에 입대해 총정치국 산하 적공국(敵工局) 소속 전사(戰士·사병)로 복무하면서부터다.

김일성정치대학 출신 엘리트 간첩

통상 563부대로 지칭되는 적공국은 애초 인민무력부 내 1개 국이었으나 1969년 5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인민군 총정치국 산하에 편입된 부서다. 국군 내 동조자를 포섭하고, 잠복을 통해 조직을 결성하는 등의 방법으로 국군 와해를 위한 조직 및 선전, 교란 공작을 수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삐라’ 및 대남 방송을 통한 심리전을 수행하는 것도 적공국의 임무 중 하나다. 전시에는 국군에 위장침투해 내부 소란을 유도하는 것도 이들의 역할이다.

정경학은 1978년 11월, 김일성종합대학 영문과를 중퇴하고 장교 양성기관인 김일성정치대학 보위학부에 입학했다. 1980년 11월 김일성정치대학 졸업과 동시에 중위로 임관하며 인민군 총정치국 산하 적공국 해외공작부 요원으로 선발된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대남공작원의 길을 걷게 된다.

1986년 11월 우리나라의 대학원과 유사한 김일성정치대학 연구과정에 입학해 3년간 수료한 그는 1991년 2월 노동당 산하 공작부서인 대외정보조사부(현 35호실) 대남공작원으로 선발돼 1991년 9월부터 1992년 9월까지 1년간 공작원 전문 양성기관인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체계적인 공작원 교육을 받았다.

교육 내용은 주로 사상, 정보실무, 체력단련, 자본주의 정치학 등이었다. 자본주의 정치학은 일반 대학에서는 가르치지 않는 과목이다. 그러나 공작원으로 선발된 정경학은 자본주의 국가의 고위급 인사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준까지 자본주의에 대해 배웠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입학 조건이 매우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졌다. 우선 고등중학교(우리의 중·고교를 합쳐 놓은 것으로 6년제다)의 성적이 좋아야 한다. 이런 학생 중에서도 성분이 좋고 신체검사를 통과한 학생만 입학이 가능하다.

정경학이 소속된 대외정보조사부는 1962년 4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소속 조사부를 모태로 한 기관이다. 북한은 1983년 조사부를 해체해 작전부와 대외정보조사부로 분리했다. 대외정보조사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공작원의 해외 파견과 대남 정보 수집 및 테러 등 해외공작을 수행하는 것이다. 적대국인 남한과 미국·일본 등에서 정치·군사 등에 관해 분야별로 정보도 수집한다. 또 제3국을 통한 대남 정보사업 추진 및 북한 공작원의 해외 거점을 확보하는 것도 이들의 임무다. 적국에 침투할 때는 주로 외국인으로 신분을 세탁한다.

그러나 국정원은 아웅산 폭파사건(1983년 10월 인민무력부 정찰국과 공조), 김현희·김승일의 KAL 858기 폭파사건(1987년 11월), 필리핀인 위장 간첩 ‘깐수’ 사건(1996년 7월) 등이 모두 대외조사부 소행인 것으로 보고 있다.

정경학이 검찰 수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대외정보조사부는 1996년 3월5일 “모사드와 같이 작고 단단한 조직을 만들라”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이 지시가 있었던 날을 기념해 ‘35호실’로 개칭됐다. 이후 업무도 남한과 미국·일본 등 적대국가에 잠입해 고급 정보를 수집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첫 번째 국적 세탁 시도 실패로 끝나

북한이 공작원 선발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친인척 관계다. 친가는 7촌까지, 외가는 3촌까지의 친인척 중 중범죄자가 존재하는지, 남한 및 해외에 친인척이 있는지 여부를 집중적으로 조사한다. 각 시·도 노동당 조직부에는 35호실 공작원 선발을 전담하는 305호실이 있어, 여기서 대상자를 물색해 선발한다. 또 정보수집을 주요 임무로 하는 만큼 지적 능력을 중요시해 주로 대학 졸업자 중에서 공작원을 선발한다. 이때 외국어 구사 능력이 중요한 기준이 된다. 공작원의 절반 이상이 평양외국어대학 출신이며, 김일성종합대학 외국어문학부 출신이 많이 공작원으로 뽑히는 이유다.

그러나 공작원 출신 탈북자에 따르면 공작원 선발의 최종 기준은 적대국에서 활동할 수 있을 정도의 지적 능력을 갖추었는가다. 35호실 공작원은 대통령을 비롯한 적대국의 최고위층과 접촉해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받는다.

35호실 간부과에서 최종적으로 공작원 선발을 확정하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개별적으로 결재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 통보는 개인별 구두로 “김정일 장군님의 비준에 따라 공작원으로 임명됐다”고 통보한다.

“주민등록 체계가 전산화돼 있지 않아 신분 세탁이 용이한 방글라데시로 침투하라.”

해외공작요원으로 선발돼 13년간 혹독한 훈련을 받은 정경학이 1993년 1월 대외정보조사부로부터 처음 받은 지령이다. 적대국 잠입을 준비하기 위해 활동하는 ‘직파조’에 소속된 그는 평양시 순안구역에 있는 초대소에서 약 7개월간 머무르며 무전 송·수신, 난수 조립 및 해독, 운전 등은 물론 현지에서 공작금을 자체 조달하기 위한 재정사업 교육까지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1993년 7월27일, 공작금으로 7,000달러를 받은 그는 베이징(北京)을 거쳐 8월5일께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 도착했다.

▶필리핀 수사당국이 현지 법원의 압수수색영장을 발부 받아 정경학의 숙소를 수색하러 가고 있다. 국정원은 해외저보 채널을 통해 필리핀 당국에 범죄 관련 정보를 제공해 필리핀 당국이 정경학 주거지에 대한 압수수색을 하도록 했다.

과거 주로 해안을 통해 침투시키던 북한이 근래 외국인 위장침투로 선회한 까닭은 외국인 위장침투의 경우 일단 국적을 세탁하면 이후 남한에서 합법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외국인 비즈니스맨으로 위장해 활동할 경우 수입상을 가장한 또 다른 간첩과 자연스러운 만남을 갖는 것도 수월해진다. 그뿐만 아니라 외국시민권자인 만큼 여권과 비행기표를 늘 가지고 다니며 유사시 언제든 출국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정경학의 첫 번째 국적 세탁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현지 사정이 북한에서 예상했던 것만큼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국적 세탁을 위해 현지인을 매수하는 작업은 40대 현지 관광안내원 모하메드 알리를 150달러에 매수해 비교적 쉽게 해결됐다. 정경학은 알리의 여권 신청서에 자신의 사진을 붙이는 방법으로 위조 여권을 발급받았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알리와 외모에서 차이가 많이 났을 뿐만 아니라 언어와 풍습의 차이가 컸다. 도저히 알리 행세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그는 방글라데시 도착 15일 만에 현지 정착을 포기하고 베이징으로 복귀했다.

첫 번째 임무에 실패하고 한 달 만에 베이징에서 대외정보조사부 변복현 과장을 만난 정경학은 토의 끝에 태국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방글라데시에 비해 언어도 배우기 쉽고, 무엇보다 중국인이 많아 침투에 용이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곧장 짐을 꾸린 정씨는 공항으로 향했다. 태국 침투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방글라데시에서 입수한 모하메드 알리 명의의 위조여건을 사용했다.

1993년 9월 초 태국의 수도 방콕에 도착한 그는 1년여 동안 고정월급이 없는 국제직업학교 관리인, 자동차 수리공 등으로 일하며 태국어를 익히는 한편, 현지 노동자들을 사귀며 태국사회에 적응하는 기간을 가졌다. 그러는 사이 1993년 말께 김정일의 특별지시로 인민무력부 ‘정찰국’ 산하에 대남 군사·전략정보 수집 전담기구인 문화연락실이 창설됨에 따라 정경학 역시 문화연락실 소속으로 변경된다.

장봉림 실장 및 변복현 부실장을 비롯해 지도원 8명, 공작원 40여 명으로 조직된 문화연락실의 주임무는 남조선의 전략 및 군사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인민무력부 산하이지만 김정일 서기실(비서실)로 직보하는 체제였다. 그러나 문화연락실은 1997년께 장봉림이 숙청되면서 해체된다.

어느 정도 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자신감을 갖게 된 정경학은 1995년 2월께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농기구 등 철물 제작업체인 ‘탄붓(TARNBUCH)’사에 무역부장으로 취직했던 것. 그는 월급은 물론 주택·차량까지 제공받으며 현지 자립기반을 마련하는 데도 성공했다. 또 그는 탄붓을 방문한 한국인 손모 A실업 대표에게 접근해 친교관계를 형성했다. A씨는 정씨가 1·2차 국내에 침투했을 때 지리 안내와 환전을 대신해 주는 등 그에게 톡톡히 도움을 제공한다.

1995년 6월께는 현지에서 사귄 50대 태국인 친구의 도움으로 마놋 세림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호적까지 취득하고 이 호적을 근거로 주민증·병역증명서·여권 등을 마련했다. 태국 침투 2년여 만에 완벽한 태국인으로의 신분 세탁을 마친 것이다.

1995년 12월 말, 그는 이 사실을 태국 주재 북한대사관을 통해 인민무력부 문화연락실에 보고했다. 다음해 1월20일, 평양으로 송환된 그는 그간의 활동 내용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해외활동 총화보고서’를 제출하고 합법적인 신분 취득 유공으로 ‘국가훈장 1급’을 수여받은 뒤 태국으로 복귀했다.

▶1차 침투: 종로 교보문고에서 산 전국지도 올려 보내

“남조선에 침투해 청와대·원자력발전소, 고속도로 터널 및 교량, 통신기지국을 촬영해 보고하라.”

1996년 1월, 국적 세탁에 성공해 태국에서 마놋 세림으로 살아가던 정경학에게 떨어진 지령이었다. 문화연락실장 장봉림으로부터였다. 평양으로 소환된 그는 약 1달간 60대 지도원으로부터 수집해야 할 자료와 내용의 사진촬영법을 집중적으로 교육받았다.

▶필리핀 수사당국이 정경학 주거지에서 압수한 물품들. 울진원전 등 주요 시설 촬영에 사용한 카메라, 대북 보고 및 지령 송수신용 컴퓨터, 1992년까지 북한의 지령을 수신하기 위해 사용한 A-3 단파 라디오.

일반적으로 북한이 남파간첩에게 요구하는 중점 수집자료는 북한 수뇌부의 권위·안전·만수무강에 도움이 되는 자료 혹은 수뇌부의 정책 작성에 도움이 되는 자료다. 군사·전략적으로 가치가 있는 정보 및 남한·미국·일본 등 적대국의 대북 공작과 관련한 자료도 수집 대상이다.

평양에서 자료 수집을 위한 교육을 받은 정경학은 그해 2월20일 장봉림이 “장군님의 배려로 이 공작금을 전달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건네준 공작금 5,000달러를 받아 태국으로 복귀한다. 그리고 한 달 후인 3월20일 정경학은 태국인 친구 한 명과 함께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해 7박8일간 남한에 머물렀다.

남한 침투가 처음이었던 그는 도착 이튿날 태국에서 사업 관계로 알게 된 A실업 손씨를 찾아가 은가락지를 선물로 주며 “지방 관광을 하고 싶은데 안내해 달라”고 부탁한 후 교보문고에 들러 전국 도로지도책과 관광안내 책자를 구입했다.

도착 셋째 날인 3월22일, 정경학은 A실업 직원 김모 씨가 운전하는 렌터카를 이용해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울·경주·울진 등을 이동하면서 대구 ~ 경주간 주요 터널 및 교량, 군 레이더기지 등의 좌표 산출이 가능하도록 기점 거리 표시와 숫자 등을 촬영했다. 또 동해안고속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울진원자력발전소를 망원렌즈를 부착해 촬영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도 도로표지와 군 레이더 기지, 교량, 터널 등을 촬영했다.

서울 도착 다음날 그는 A실업 직원 이모 씨의 안내로 경복궁을 방문했다. 청와대 촬영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친 시도가 모두 경비원의 주시로 실패하자 그는 당시의 국립중앙박물관 앞에서 청와대 촬영 시도 증명용 사진을 찍는 것으로 대신했다.

1996년 3월27일 태국으로 복귀한 그는 다음날 방콕으로 출장온 문화연락실 장봉림을 만나 국내에 침투해 촬영한 필름을 제출하고, 남한의 정세와 여론을 보고한다. 또 장봉림으로부터 “종로 교보문고에서 구입한 전국지도 책자를 빨리 평양으로 올려 보내라”는 지시를 받아 이틀 후 이 지도책을 태국 주재 북한대사관 당비서에게 전달한다.

▶2차 침투: 용산 미군기지 등 군사시설 촬영

“남조선에 들어가 용산미군기지·국방부·합참·대전미군기지 등을 촬영해 보고하라.”

1997년 2월 평양으로 소환된 정경학은 평양 룡북리초대소에서 1차 침투 때 청와대를 촬영하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을 받고, 세 달간 공작·사상교육을 다시 받았다. 그리고 장봉림으로부터 새로운 지령을 받는다.
1997년 5월 태국으로 복귀한 그는 한 달 뒤인 1997년 6월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한다. 가장 행세를 위해 태국인 애인도 동행했다. 남산타워 전망대에서 미8군 용산기지 전경 및 부속 건물을 망원렌즈로 찍었다. 정경학은 또 1차 침투 때 도움을 받았던 A실업을 찾아가 또다시 안내를 부탁해 이 회사 직원 안모 씨의 안내로 국방부 및 합참 건물, 미8군 용산기지 출입구 등을 촬영했다.

▶정경학이 2차 침투시 촬영해 간 용산 미8군 부대. 정경학은 남산타워에 올라 파노라마 형식으로 상세촬영했다고 진술했다.

전주로 이동하며 대전미군부대 촬영을 시도했으나 발견하지 못해 실패했다. 광주 5·18 묘역을 방문하고 서울로 돌아오는 중 한국군 탄약사령부를 대전미군기지로 오인해 촬영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다. 1996년 6월12일 태국으로 복귀한 그는 봉인한 필름을 태국 주재 북한대사관 당비서에게 제출했다.

정경학의 활동을 보면 주요 시설의 사진 촬영이 주임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은 왜 ‘겨우’ 사진 촬영을 위해 간첩을 내려보내는 것일까. 이는 북한이 왜 비싼 비용을 들여가며 직파간첩을 내려보내는지와 연계되는 질문이다. 정보전문가들은 요즘 시대에도 직파간첩을 보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 번째 이유는 전문성이다. 똑같은 청와대 사진이라고 해도 일반인이 찍는 사진과 고도로 훈련받은 전문가가 미사일 사거리를 재기 위해 찍는 사진은 앵글 등에서 다르다. 훈련받은 간첩들은 정밀 타격을 위해 미사일의 오차범위까지 계산해 사진을 찍는다는 말이다.

실제로 정경학은 대외조사부 시절부터 틈이 날 때마다 사진촬영기법을 교육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으로부터 인공위성 사진을 받는 우리와 달리 북한은 중국·러시아로부터 인공위성 사진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직파간첩이 찍어온 정밀 사진에 대한 의존도가 우리보다 훨씬 크다.

두 번째는 신뢰성이다. 이는 인터넷 등으로 웬만한 정보는 거의 다 입수할 수 있는 시대에도 북한이 간첩을 내려보내는 가장 큰 이유다. 대공관계자들의 말이다.

“모든 공작지도부는 자신들이 직접 훈련해 내려보낸 사람이 아니면 믿지 않는다”며 “북한 공작지도부도 예외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북한은 남한사회의 친북 좌파 인사를 기본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문적인 훈련이 부족할 뿐더러 역정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이중간첩일 수 있다는 의심에서다.

세 번째 이유는 조직성이다. 간첩의 기능이 정보 취득 한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직파간첩이 파견될 때는 현지에 조직을 구축한다거나 점검하는 임무가 꼭 따른다. 이른바 현지 정기감사를 위해서다. 이를 두고 대공관계자들은 “직파간첩은 절대 혼자 내려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3차 침투: 남한에 신분이 노출 안 됐음을 증명

“태국에 나가 명절을 기회로 남조선에 잠깐 다녀오는 방법으로 위장 신분 노출 여부를 확인하되 절대 남조선 사람들은 접촉하지 말라.”

1997년 정경학은 장봉림 실장의 숙청으로 인민무력부 산하 문화연락실이 해체되면서 노동당 산하 35호실 소속으로 변경된다. 그해 10월 북한으로 소환돼 들어간 그는 김모 부부장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문화연락실장 장봉림이 간첩질을 해 위장 신분이 노출됐을 가능성이 있으니 태국 신분을 더 이상 사용하지 말라”는 지시였다.

▶정경학이 1차 침투시 촬영해 간 울진원자력발전소.

그러나 정경학은 “나의 신분이 남측으로 나갔다는 정보는 없다. 남한에 직접 들어가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음을 증명하겠다”고 맞섰다. 간신히 김모 부부장의 승낙을 받은 그는 35호실 공작원으로서 무전 수신용 라디오와 새로운 난수표·어음 및 공작금 1만 달러를 수령한 후 태국으로 복귀한다.

1998년 1월29일 태국인 애인과 함께 마놋 세림의 여권으로 입국한 그는 시내 관광 및 쇼핑, 시청 앞 기념촬영 등을 하며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1월31일 곧장 태국으로 복귀했다.

▶4차 침투: 장기 침투 위한 여건 탐색 중 검거

신분 노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감행한 3차 침투가 있은 지 불과 1년 뒤인 1999년 2월. 정경학의 신분을 알고 있던 태국 주재 북한대사관 과학기술참사의 탈출 사건으로 인해 정경학은 대남공작원 생활 사상 최대의 위기에 처한다. 그의 신분 노출을 우려한 35호실은 일단 정경학을 평양으로 소환했다. 그러나 정경학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김모 과장은 그를 1999년 11월 다시 베이징으로 보낸다. 베이징에서 신분을 세탁하고 남조선의 정세 자료를 수집, 분석해 보고하라는 지시였다.

베이징에 도착한 그는 한동안 인터넷 검색을 통해 남한 정세를 분석하는 업무를 하며 추이를 관망한다. 매일 3~4시간 이상 인터넷을 뒤지며 남한 정세를 분석해 매주 본부에 보고하는 것이 그의 주된 임무였다. 그러던 2000년 5월, 중국인 브로커에게 1,000달러를 주고 네이멍구 자치주 출신 이 용(李勇) 명의의 공민증을 획득해 중국인으로 국적을 세탁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의 중국인 생활은 한 달 만에 끝난다. 그를 베이징으로 보낸 김모 과장이 “정 동지는 앞으로 큰일을 수행할 것에 대비해 필리핀으로 침투해 활동 토대를 구축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그는 중국인 공민증을 본부에 반납하고 다시 필리핀인으로 변신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2001년 9월께 35호실 김모 과장으로부터 “필리핀에서는 약정된 음어를 사용해 이메일로 연락하라”는 지시와 함께 공작금 1만 달러를 받고 필리핀으로 침투했다. 이후 그는 태국 침투 때와 똑같은 궤적을 밟아갔다. 우선 현지어 습득 및 적응 과정을 거친 뒤 열대 과일의 일종인 ‘노니’를 재배, 가공하는 사업체를 차린 것. 현지 후원인을 통해 국적 세탁 작업도 병행했다.

그는 또 태국에 있으면서 인터넷 펜팔 사이트를 통해 알게 된 국내 이모 여교사와 종교·인생문제, 혹은 자신이 재배하는 열대 과일 노니 사업 등에 관한 이메일을 수시로 주고받으며 이씨에게 ‘한국 정부는 왜 이라크에 파병하려고 하는가’ ‘한국민은 미국의 노예일 뿐이다’라는 말로 이씨의 사상을 떠보기도 했다. 또한 이씨의 신원을 북한에 보고하고, 그의 가족사진을 받아 놓았다. 혹시라도 나중에 협조자로 활용할 때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2004년 4월, 그는 현지 변호사를 통해 ‘켈톤 가르시아 오르테가’라는 가공의 인물로 출생증명서를 발급받고, 이 출생증을 이용해 여권·운전면허·건강보험증 등을 발급받아 국적 세탁을 완료한다. 5년여에 걸쳐 국적 세탁 및 국내 침투 기반을 마련한 그는 지난 3월 중국을 방문해 35호실 이모 지도원을 만나 “국적 세탁이 끝나 남조선 침투 준비가 완료됐다”고 보고한다.

지난 6월, 정경학은 중국에서 다시 만난 이모 지도원으로부터 1만 달러를 건네받으며 “남조선에 침투, 장기 활동을 위한 여건을 탐색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이 지시에 따라 6월27일 입국한 그는 30일까지 장기 암약 여건을 탐색한 뒤 출국하기 위해 호텔을 나서던 중 검거됐다. 10여 년에 걸친 암약이 마침내 막을 내린 것이다.

정경학이 검거되지 않았다면 그는 남한에서 무슨 일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공안 관계자들은 “남한에서 고정간첩으로 암약하며 북한이 내려보내는 다양한 지령을 수행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 지령은 요인 암살도 될 수 있고, 건물 폭파도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국정원, 간첩 안 잡나 못 잡나?

한나라당 권영세 의원이 지난해 11월 말 내놓은 국정원 자료에 따르면 북한이 최근 5년간 한국으로 쏘아보낸 지령 통신은 670건. 국내에서 간첩이 활동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한 대공 관계자는 “DJ정부 이후 간첩이 3배 이상 늘었다”고 말한다. 한국사회가 과거와 비교해 간첩들이 암약하기에 훨씬 용이한 환경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특히 조선족 및 탈북자의 입국이 늘어남에 따라 이들 틈에 끼어 들어오는 간첩도 상당수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국정원이 검거한 간첩은 2001년 4명, 2002년 2명, 2003년 3명, 2004년 2명, 2005년 2명 등이었다. 간첩을 안 잡는 것이냐, 못 잡는 것이냐 하는 논란이 이는 이유다. 이에 대해 대공 관계자들은 “안 잡는 것 반, 못 잡는 것 반”이라며 어려움을 호소한다.

“10%의 심증으로 시작해 90% 물증을 잡아야 끝나는 것이 간첩 수사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작이 필요죠. 그런데 그것이 요즘 세상에서는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한 대공 관계자의 말이다. 그는 간첩 검거율이 떨어진 가장 큰 이유로 ‘찬양고무죄’의 사문화를 들었다.
“사실 간첩이 간첩이라고 얼굴에 써 놓고 다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만 이들의 말투나 행동을 통해 짐작할 수 있을 뿐이죠. 일반인들은 못 느끼지만, 10여 년 이상 간첩 수사를 해 온 전문 수사관들은 그 미묘한 차이를 잡아낼 수 있거든요. 과거에는 말투나 행동이 간첩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있으면 찬양고무죄로 입건해 본격적으로 수사를 할 수 있었죠. 그 과정에서 많은 간첩이 잡혔고요. 그러나 찬양고무죄가 사문화된 요즘 간첩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눈에 띄어도 수사할 수 없으니 눈앞에서 그냥 보고만 있는 경우가 다반사죠.”

그는 “과거 정부가 찬양고무죄를 남용해 무고한 사람에게 간첩의 오명을 씌웠던 것도 사실”이라며 “그 역풍의 결과가 오늘의 현실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대공 관계자는 “국정원 개혁이다 뭐다 해서 유능한 정보원을 다 내보낸 결과 국정원 내 대공수사 기능이 완전히 무너져내린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DJ정부 이후 지난 1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대공수사국의 기능과 활동범위를 축소하고, 조직과 인원을 감축하는 등의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대공수사 기능이 마비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그는 “한반도에서는 아직 냉전이 종식되지 않았다. 남북정상회담·금강산관광·개성공단 등 일련의 ‘이벤트’로 냉전의 강도만 낮아졌을 뿐이다. 그런데 이것을 냉전의 종식으로 착각하고 마치 간첩이 없어진 양, 대공수사 기능이 필요 없는 양 착각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한다.

‘공안’이라는 말만 입에 올려도 ‘수구 골통’ 취급하는 우리 사회 분위기로 인해 젊고 유능한 경찰 및 검사들이 대공분야를 기피하고 있다. 물론 공안 관계자들 역시 과거 공안정국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국민의 자유의 대가, 혹은 그 비용이 무엇인지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오효림 월간중앙 기자

정경학 주요 행적

1958년 11월27일 함경남도 함주군 함주읍 출생
1976년 9월 김일성종합대학 외국어문학부(영어) 2년 중퇴
1976년 9월 인민군 총정치국 ‘적공국’ 戰士(사병) 입대
1979년 7월 김일성정치대학 보위학부 재학시 노동당 입당
1980년 11월 군관 양성학교 김일성정치대학 졸업 후 중위로
임관하면서 ‘공작국’ 해외공작부 공작원 임명(1981년 2월
해외공작부가 해체되면서 조사부 지도원으로 배치)
1991년 2월 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現 35호실)’ 공작원 선발
1991년 9월~1992년 9월 김정일정치군사대학 공작반 수료
1993년 8월 방글라데시 침투, ‘모하메드 알리’로 국적 세탁
1993년 9월 태국 침투, 태국인 ‘마놋 세림’으로 국적 세탁
1993년 말 인민무력부 정찰국 산하 ‘문화연락실’ 공작원으로 소속 변경
1996년 3월~1998년 1월 3회 국내 침투, 울진원전 등 사진 촬영
1997년 10월 노동당 산하 ‘35호실’ 공작원으로 원복
1999년 11월 중국 베이징 침투
2000년 5월 중국인 ‘이용(李勇)’명의 공민증 취득
2001년 9월 필리핀 침투
2004년 5월 필리핀인 ‘켈톤’으로 국적 세탁, 무역업·노니(열대과일)
농장 지배인 등으로 위장 활동
2006년 7월31일 국내 4차 침투만에 검거

외국인 가장 국내 침투 간첩 사례

“1985년 이후 모두 4건 적발”

▶일본인 가장 간첩 신광수(1985년 2월)
- 1981년 6월 노동당 조사부 소속 재일공작원 신광수가 일본인 ‘하라타 다아키’를 납치해 북송한 후 하라타 다아키로 위장해 일본 및 국내에 침투했던 사건. 그는 재일본 대한민국거류민단(민단) 및 일본인을 포섭해 대남정보를 수집했다. 1985년 2월 국내 침투시 검거됐다.

▶ 일본인 가장 김승일·김현희(1987년 11월 KAL858기 폭파사건)
- KAL기 폭파를 위해 위조여권을 이용해 김승일은 ‘하치야 신이치’로, 김현희는 ‘하치야 마유미’로 위장, KAL 858기를 폭파한 사건.

▶ 필리핀인 위장 ‘깐수’(1996년 7월)
- 대외정보조사부 소속 공작원 정수일은 1979년~84년까지 레바논인, 필리핀인 등으로 국적을 세탁해 1984년 5월 필리핀 국적으로 국내에 침투했던 사건.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며 대남정보를 수집, 북에 보고했다.

▶ 말레이시아인 위장 진운방(1998년 12월)
- 말레이시아 화교 ‘진운방’으로 위장한 대외연락부 소속 공작원이 1987년5월~1992년 8월 국내에 침투해 서울에서 ‘삿떼마리아’ 등 말레이시아 음식점을 운영하며 암약했다. 이후 그는 1998년 10월 ‘민혁당’ 조직 검열 등을 목적으로 국내 재차 침투해 임무를 수행한 후 같은 해 12월 전남 여수해안에서 반잠수정을 이용해 복귀하던 중 우리 군에 의해 사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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