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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무자 도덕적 해이 우려"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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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면책 결격 사유가 있더라도 판사가 개인 파산자의 딱한 사정을 감안해 빚을 탕감해 줄 경우(재량면책) 일부가 아닌 전액을 면책해줘야 한다는 대법원의 첫 결정이 나왔다.

지금까지 재량면책 땐 결격 사유의 경중에 따라 면책비율을 일정하게 제한했다. 이번 대법원의 결정은 빚에 시달리는 파산자의 어려움을 덜어주고 경제적 재기를 돕는다는 취지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채무자들이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도덕적 불감증에 빠질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경제적 갱생 위해 전액 면책"=대법원 2부(주심 김능환 대법관)는 파산자 김모(44)씨가 "어머니 질병치료 등으로 신용카드를 사용했고, 빚 갚을 능력이 전혀 없는 생활보호대상자인데도 채무 중 일부만 면책한 것은 부당하다"며 낸 면책 신청사건 재항고심에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전주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8일 밝혔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김씨는 직장을 못 구했을 뿐 아니라 국민기초생활보장법상 수급자이며 투병 중인 모친과 두 자녀를 부양하는 처지여서 상당한 소득을 올릴 수 있다고 예측하기 어렵다"며 "채무를 남겨둘 경우 다시 파탄에 빠지는 사태가 초래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돌려막기'와 '카드깡'으로 생계를 꾸려오다 은행 등의 빚을 지자 2004년 법원에 파산과 면책을 신청했다. 개인 파산.면책 심사 과정에서 김씨가 아파트 보증금을 빼내 다른 채권자들 모르게 처제에게 꿨던 500만원을 변제하는 등 결격사유가 드러나기도 했다.

1.2심 재판부는 김씨의 행위가 면책 불허가 사유에 해당한다고 봤으나, 돈을 어머니 질병치료 등에 쓴 점 등을 감안해 채무의 70%를 면책토록 결정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일선 법원에선 재량면책 때 100%를 해주는 게 이미 일반적"이라며 "대법원 결정은 재량면책을 할 때는 원칙적으로 전액을 해줘야 한다는 점을 최종 확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 우려"=대법원 결정으로 빚을 진 뒤 파산 및 면책을 신청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등 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상대적으로 미흡한 채권자 보호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현재 법원에서 개인이 빚을 탕감받을 수 있는 방법은 개인회생과 파산.면책 등 두 가지가 있다. 2004년 9월 시행된 개인회생제도는 5년간 부채의 일정 부분을 갚아야 남은 빚을 탕감받게 된다. 반면 개인파산은 취업과 금융거래에 제한을 받지만 면책을 통해 한꺼번에 부채를 털어버릴 수 있다.

올 들어 8월까지 법원에 접수된 면책 신청은 7만8982건으로, 이 가운데 90% 이상이 승인됐다. 면책 신청자 중 상당수는 카드깡이나 돌려막기 등 면책 불허가 사유에 해당하지만, 판사가 파산자의 사정을 감안해 재량면책을 허용한 데 따른 것이다. 현재 잠재적 파산자 수는 적게는 40만 명, 많게는 100여만 명으로 추정되며 이번 대법원 결정으로 면책 신청자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김재형 서울대 교수는 "현행법에는 채권자의 입장이 반영돼 있지 않다"며 "독일처럼 채무자에게 '성실의무기간(일정기간 성실하게 일을 하게 해 그 돈으로 채무 일부를 변제한 뒤 면책해주는 제도)'을 두는 방안을 강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파산절차에서 이미 채무자의 재산과 능력을 다 검토한 뒤 면책절차에 들어간다"며 "법원에선 갚을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채무자는 개인회생 쪽으로 유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혜수.박성우 기자

◆ 면책=개인 파산제도에서 법원이 파산선고를 받은 뒤 채무자의 면책 신청을 받아들여 파산자로서의 모든 불이익을 면제하고 채무를 취소하는 조치다. 통합도산법(564조)에서는 ▶허위 신청서류를 제출하거나 ▶과다한 낭비나 도박 등으로 빚을 진 경우 등의 결격 사유가 없으면 면책을 허가토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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