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책지식 생태계 현주소는?

중앙일보

입력 2006.09.26 04:51

업데이트 2006.09.26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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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9.11테러가 발생한 지 8일 만인 2001년 9월 19일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한 편의 보고서를 냈다. 9.11은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 장기적인 전쟁이므로 대응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이어 헤리티지재단이 '미 본토를 방어하기 위한 중앙조직이 필요하다'고 제언하는 등 미국의 두뇌들이 줄줄이 정책 대안을 쏟아냈다.

미 정부는 일주일 뒤 '국토안보국(현 국토안보부)'을 설치했다. 초유의 국가위기에 대응하는 정책의 골간이 보름 만에 만들어져 실행된 것이다. 이처럼 미국에서는 정책의 바탕이 되는 지식을 생산하는 연구소.학계, 이를 활용하는 정부.의회 사이의 인적.지적 네트워크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 과연 한국에도 이런 네트워크가 작동하고 있을까. 삼성경제연구소와 중앙일보는 25일 '한국 정책지식생태계 활성화 전략' 심포지엄을 열어 한국 정책지식의 현주소를 점검하고 대안을 모색했다. 정구현 삼성경제연구소장은 "미국 등 선진국은 국가전략을 뒷받침할 풍부한 지식이 수많은 싱크탱크의 경쟁과 협력을 통해 공급되고 선별된다"며 "그러나 한국은 높은 교육 수준과 뛰어난 정보기술(IT) 인프라를 갖추고도 국가전략을 뒷받침할 지식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 정책지식의 파편화=삼성경제연구소는 2003년 참여정부 출범 이후 이라크 파병 등 9개 핵심 쟁점과 관련된 연구보고서.논문.칼럼 1249편을 분석했다. 이들 정책연구물의 내용과 인용 출처를 따져 연구자들의 상호작용을 실증적으로 따져보기 위해서다.

보고서는 한국 정책지식생태계에선 정책 전반을 아우르는 통합적 관점을 가진 연구물과 연구자를 발견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정책지식의 파편화'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일례로 일반인의 상식으로 부동산 문제와 교육평준화는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두 정책을 다룬 연구물 289편 중 연관성을 의식한 연구는 한 편도 없었다. 학계.연구소의 실증적 지식이 뒷받침되지 않은 채 정부.정당.시민사회가 '말싸움'만 하고 있는 형국이다. 9개 쟁점 중 행정수도 이전, 부동산 정책, 증세.감세 논쟁에서 그나마 미약한 연결관계가 나타날 뿐이다.

국책연구기관.정부위원회, 정당.국회의원의 참여가 낮은 것도 한국 지식생태계의 특징이다. 국책연구기관은 행정수도 이전, 국가보안법 개폐, 이라크 파병, 자유무역협정(FTA) 논쟁에 아예 참여하지 않거나 참여하더라도 변두리에 머물렀다. 국민적 관심 사안인 부동산 정책의 경우 8.31대책 이후에야 정당.의원의 정책연구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보고서는 정부.국회와 지식사회를 매개해야 할 연구원이나 국회의원이 제 몫을 못할 경우 검증되지 않은 지식으로 정책이 추진될 위험이 커진다고 우려했다. 또 국가보안법 개폐, 이라크 파병, 증세.감세 논쟁이 지식에 근거하지 않은 감정싸움, 힘겨루기, 막말 대결에 그쳤다고 평가했다.

◆ 지식의 해외 의존 커=국내 현실에 바탕한 연구보다 유력 국제기구에 기댄 연구를 선호하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보고서에 따르면 타인 및 타기관의 연구를 인용한 정책연구물 599편 중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8개 국제기구를 인용한 것은 190편(31.7%)에 이르렀다. 특히 OECD(58편 인용), 유엔(28편), IMF(26편)는 전체 인용 순위에서 각각 2, 3, 4위를 차지했다.

연구물 중 171건(28.5%)은 정책입안자인 정부(책임자)를 인용했다. 이는 정책입안 이전에 인용할 만한 정책지식이 없었거나 사전에 검증된 지식 없이 정책이 입안됐음을 뜻한다. 윤영수 연구원은 "행정수도 이전처럼 정부나 정계 리더가 문제를 제기하자 이전에 충분한 연구성과를 내지 않은 지식인.학계가 해외사례나 찾아 논리를 펴는 것이 우리 정책지식의 현주소"라고 말했다.

◆ 정부.학계 교류 늘려야=김선빈 수석연구원은 "한국은 전반적으로 지식의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대화.협력이 적은 것으로 보인다"며 "정부.학계.연구소 간의 인적.지적 교류가 저조한 것이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지식생태계는 국회.정당의 연구모임이 늘고 비정부기구(NGO)의 연구가 증가하는 등 개선 조짐이 나타났지만 질적 도약은 의심스러운 수준이라는 것이다.

독일.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국가적 위기를 맞을 때면 지식사회와 정부.의회의 인적.지적 네트워크가 국가전략과 정책지식을 제공하고 있다. 1990년대 갑작스러운 통일을 맞이한 독일은 유력 경제학자 5명으로 구성된 '5현자(賢者)위원회'가 정부에 경제정책의 큰 방향을 제시했다. 이들은 동.서독의 평준화 정책에 반대해 시장 요구를 수용하도록 줄기차게 권고했다. 최근 우정사업 민영화에 성공한 일본도 고이즈미 전 총리가 각종 공식 기구와 비공식 모임을 통해 구조개혁에 필요한 지식과 여론을 결집했다. 시민사회의 발전이 더딘 중국은 2002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SARS) 확산 당시 민간 부문의 협조 없이 정부 노력만으로 극복하려다 실패했으나 최근 이를 반성하고 개선하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천인성 기자

◆ 정책지식생태계=자연생태계는 동식물의 먹이사슬이나 종(種)들의 경쟁을 통해 환경에 적응.성장한다. 국가에도 지식의 생산자인 학계.연구소와 소비자인 정부.정당.국회.NGO.언론 사이에도 경쟁.협력의 네트워크가 있다. 이를 정책지식생태계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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