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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84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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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위폐사건」 공산당에 큰 타격/기지 풍비박산… 기관지 빼앗기고 간부들 잃어
정판사 위폐사건을 담당하여 취조하고 기소한 검사는 조재천과 김홍섭이었다.
조재천은 뒤에 장면 정권의 장관이 될 정도의 숨은 한민당 핵심간부이고 김홍섭은 한민당 최고간부의 한사람인 김준연의 사위였다. 이러한 정치적인 인물이 정치적 배경을 가졌다고 보여지는 정판사 위폐사건을 담당한 사실이 공산진영에는 이상하게 비쳤다.
정판사 사건으로 공산당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첫째로 공산당 중앙본부의 기지를 빼앗겼다. 둘째로 공산당의 입 역할을 하는 기관지 해방일보를 폐쇄당했다. 셋째로 방대하고 최신식 인쇄시설을 가진 정판사를 빼앗겼다. 넷째로 권오직ㆍ이관술ㆍ박락종 같은 우수한 간부를 잃었다. 다섯째로 공산당의 위신이 추락했다.
이것들은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이었다.
공산당에서는 수도경찰청장 장택상과 핫라인을 가지고 있는 김광수를 파견하여 장택상에게 항의했다. 장택상은 일단 김광수에게 이관술과 권오직에 대한 미 군정청의 체포령이 내렸지만 자기는 이 두사람을 체포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이관술과 권오직은 멀리 피하지 않고 서울시내에 있었는데 그렇게 안심시켜 놓고 이관술을 체포해버렸다.
그때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 일제때 고문왕으로 악명 높았던 노덕술이었다. 장택상의 진의는 어떠했는지 몰라도 노덕술이 필사적으로 이관술을 체포했다. 얼굴은 권오직이 더 노출되어 있었는데도 권오직은 체포되지 않았다.
이관술과 노덕술과의 만남은 이번이 세번째였다. 이관술과 노덕술은 다 같은 울산 사람이었다. 노는 해방되면서 일제고등계 경찰에서 미군정 경찰로 옮겼고 도리어 영전됐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관술이 살아있으면 자기의 전죄가 언젠가는 폭로될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내가 이관술을 처음 만난 것은 해방일보에 들어가서였다. 일본군 졸병의 군복을 입고 처음 권오직을 찾아왔을때 그의 얼굴이 너무나 촌사람같고 경상도사투리를 써 시골에서 올라온 농부인줄 알았다. 권오직이 벌떡 일어나 문간까지 뛰어가 『이관술 동무』하고 손을 내밀며 맞이하는 것을 보고 그가 그 유명한 이관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일제때 이재유와 같이 서울 교외의 창동에서 농부로 가장한 채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당재건공작을 하고 있었다. 낙동강 수해로 농토를 잃은 이재민이라고 속이고,이재유를 「큰돌이」,이관술을 「작은돌이」라 하며 형제같이 가장하고 있었다.
이재유는 경성제국대학 학생 정태식과 같이 경성제대 일본인 교수 미야케 시카노스게(삼택록지조)를 포섭한 일로 유명하나 그 후 그는 체포되어 1945년 봄 몇달 뒤에 닥쳐올 해방을 보지 못하고 옥사하고 말았다.
이관술은 공산당 재정부장이었기 때문에 대중공작의 전면에 나서지 않아 당내에서도 얼굴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내가 이관술을 최후로 본 것은 46년 4월17일 종로 YMCA강당에서 개최된 조선공산당 창건 21주년 기념식장에서다. 조선공산당 창건기념식을 공개적으로 개최한 것은 46년의 기념식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날 기념식이 끝나고 헤어지는데 누군가가 『이관술 동무! 오늘 고까 입었네』하고 놀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나는 곳을 쳐다보니 신사양복을 입은 이관술이 서서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누구 양복을 빌려입었는지 풍성해 맞지도 않고 와이셔츠 칼러도 쭈굴쭈굴하며 넥타이도 십년이나 매었는가 색깔이 바래진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검소해도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원을 하던 고급 인텔리였다.
그는 조국독립 이외에는 세속지사에는 아무 흥미가 없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 나서 독립운동한다고 몇번 경찰에 잡혀 죽을 고문만 당하고 6ㆍ25때 교도소 안에서 죽은 사람이다.
그의 누이동생 이순금은 해방전에는 박헌영과 같이 민족 해방투쟁을 했고 해방후에는 김삼룡의 처로 갖은 고생을 했다. 6ㆍ25후 그녀와 정태식과 나와 세사람이 만나 죽은 김삼룡과 이관술의 이야기를 하며 운 일이 생각난다.
이순금은 김삼룡과의 사이에 낳은 아이 하나를 데리고 이북으로 갔는데 남로당 「숙청」때 그녀도 화를 당했을 것을 생각하니 이관술ㆍ이순금 남매의 운명이야말로 정말 기구하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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