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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5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전 남로당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장택상,노덕술등 일제 고등계 형사 기용/「학병사건」후 공산당과 마찰
해방일보로 돌아와 사장실에 취재 내용을 보고하러 들어가니 마침 박헌영이 와 있었다.
수도경찰청에 가서 장택상 청장을 처음 만난 사실을 자세히 다 이야기했다.
그날 기자회견에 관한것 뿐아니라 장택상의 경력,인간 관계,그리고 수도 경찰청의 과장급 이상 간부들에 대해 사전에 요해한것도 보고했다. 특히 최영ㆍ노덕술등 수도경찰청 간부들은 독립운동자들을 고문 학살한 악명높은 친일 경찰관 출신들이었다.
특히 노덕술에 대해서는 박헌영도 잘 알고있었다. 『이관술 동무를 고문한 자지』하였다. 노의 고문에 한번 걸려들면 전부다 고백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죽든지,두가지 길중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관술만은 고백하지도,죽지도 않았다.
이관술이 두번째 체포되어 또 노의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노는 자기의 고문기술 기록을 이관술이 깼다고 두번째에는 바로 죽도록 고문했다. 그러나 이관술은 끝까지 버텨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그래서 고문마 노덕술에게 이긴 이관술이라 하여 이관술의 이름은 독립운동자들 가운데는 불사조와 같이 전파됐었다.
이관술은 경남 울산 사람으로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동덕여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독서회를 조직,민족해방 투쟁에 들어선 사람인데 아주 조용하며 순한 사람이었다.
박헌영이 노덕술의 이관술 고문 이야기를 꺼내자 권오직도 자신이 고문당하고 자기의 형 권오설이 고문당해 옥사한 이야기를 했다.
권오설은 1926년 6월10일 소위 「6ㆍ10 독립만세 투쟁」을 조직 지도한 공산당원이었다.
장택상이 그런 친일 악행 경찰관들을 수도경찰청 간부로 채용한데 대해 권오직은 장택상의 장형 장길상이 임정계 독립운동자에게 육혈포를 맞아 죽은 이야기를 하면서 비난했다.
권과 장은 다같은 경북 출신으로 권오직은 장택상 집안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군정청 기자회견에는 매일 참석했으나 수도 경찰청 기자회견에는 매일 가지는 않았다. 장택상은 안하무인격으로 직위상 자기의 상부인 경무부장 조병옥을 존칭하는 법도 없고 조금도 윗사람 대접을 하지않는 어조였고 무엇이든지 제멋대로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또 옛날 서울 사대문 안에서는 귀가 좋고 사대문 밖에서는 부를 쳐주었는데 자기집은 부귀를 겸한 집으로 조선에서 자기집만한 명문대가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경상감사를 지냈었다. 경상감사하면 지금의 경남북을 합친 도지사다.
그는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때 런던에서 제일 비싼 고급 구두를 사가지고와 서울에서 며칠밖에 신지 않았는데 발밑이 이상해 신밑창을 보니 구멍이 뚫려있었다는 것이다.
이상하다 싶어 진고개의 일본인 구둣방에 가서 보이며 물어보니 『이 구두는 실내 융단위에서 신는 구두지 서울과 같이 포장도 되지않은 길에서 신는 구두가 아니다』고 했다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그는 우리들 신문기자들과 만나는 자리에서도 양복 웃저고리를 벗고 여자 비서에게 어깨를 주무르게 하면서 온갖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와의 회견을 마치고 신문사에 돌아와서 보고서를 작성하려해도 아무것도 쓸만한 것이 없었다.
그는 특히 나에게 미국의 주간화보 『라이프』지의 미국 경관이 데모군중들을 경찰봉으로 때리는 사진을 보이며 『미국과 같은 민주국가에서도 경찰은 데모군중에 대해 이렇게 진압한다』고 강조하면서 『수도경찰청 경찰이 데모군중을 진압하는 것은 결코 과잉진압이 아니다』는 것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는 김성수ㆍ송진우도 우리들 앞에서 아무 존칭도 없이 이름을 불러댔고 다만 하지에 대해서만 코멘더 제너럴 하지라 불렀으며 한국 사람 가운데에서는 이승만에 대해서만 닥터 리라고 했다.
우리 공산당과 해방일보는 1946년 1월19일 「학병동맹」 사건이 발생할 때까지는 장택상 수도경찰청과 별 마찰없이 무사히 지냈다.
그러나 장택상이 자기관하 1천5백명의 무장경관을 동원,삼청동 학병동맹을 새벽에 총을 쏘아대며 습격해 동맹 합숙소에 있던 학생 3명을 사살한 학병동맹 사건 이후부터는 우리 공산당과 수도경찰청의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다.
학병동맹 사건 이후부터 나는 수도경찰청 출입을 그만두게 되었다. 이때부터 장택상은 노골적으로 공산당을 적대시하게 되었는데 그의 장녀 장병민이 열성적인 공산당 동조자인줄은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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