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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강호(江湖)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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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천외(天外)의 무공, 절세미녀, 기연(奇緣), 영약이초(靈藥異草)…

꿈이 현실이 되는 상상 속의 대지, 강호(江湖). 요즘은 무협 용어로 굳어졌지만, 강호는 본래 현실 공간이었다. 강하호해(江河湖海)의 준말로 세상의 모든 물을 뜻했다. 갈홍은 '신선전'에서 중국 시조신 반고(盤古)의 피와 땀과 기름이 강호가 됐다고 적고 있다.

'반고가 죽자 소리는 뇌정(雷霆)이 되고, 두 눈은 일월(日月), 사지오체는 오악(五嶽)이 됐다. 피와 기름은 강하호해가, 살은 전토(田土)가 되고 뼈는 금석(金石)이 됐다. 몸에 붙었던 이()는 사람이 됐다.'

강호가 무협의 무대가 된 건 사마천의 '사기'에서부터. 형가와 예양이 자객 행을 펼친 중원(中原)이 곧 강호였다. 무협소설의 효시 '규염객전'은 강호의 범위를 더 넓혔다. 중국 대륙은 물론 이웃나라까지 무대로 삼았다. 규염객은 고구려까지 넘나들며 무위를 떨쳤다.(량셔우중 '강호를 건너 무협의 숲을 거닐다')

강호는 동진(東晋) 때 가상 공간으로 바뀐다. 은자(隱者)의 대명사 죽림칠현 덕분이다. 이들의 은거지를 일컫게 되면서 강호는 고고한 정신 공간으로 승격됐다. 명나라 때 '수호전'은 강호를 다시 영웅호걸의 무대로 바꿔놓았다. 탐관(貪官)과 오리(汚吏)는 벌을 받고, 양민과 민초들은 구원받는 이상향. 무(武)와 협(俠), 권선징악이 잘 작동하는 환상의 공간. 청대(淸代)를 거치면서 강호는 상상 속 피난처, 무협은 어른들의 동화가 됐다.

강호 무협을 현대 문법으로 풀어낸 이가 신필(神筆) 진융(金庸)이다. 1955년 '서검은구록'을 시작으로 72년 '녹정기'를 내놓고 절필했다. 17년간 15편. 중국 작가 니쾅(倪匡)은 여덟 자로 진융의 작품을 평했다. 그 유명한 팔자평(八字評)이다. '고금중외 공전절후(古今中外 空前絶後:고금과 동서, 과거와 미래를 막론하고 견줄 것이 없다)'.

진융의 대표작 '소오강호(笑傲江湖)'는 '강호를 웃으며 오시한다'는 뜻이다. 주인공 영호충은 마(魔)에 빠진 사부를 베고, 강호를 떠난다. 절세 무공과 권력만을 좇는 비정 강호에 대한 염증이 담겨 있다. 그 소오강호가 다시 뜨고 있다. 무협계가 아닌 한국 정치판에서다.

인사청탁을 거절했다가 되레 인사권자에게 버림받았다는 '보복 인사설'의 주인공 유진룡 전 문화관광부 차관. 그는 요즘 세상이 "소오강호를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현실이 암울할수록, 삶이 어려울수록 강호가 뜬다는데 정말 그런가 보다.

이정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