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스포츠융성…88올림픽 절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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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80년대에는 5공화국의 철권통치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부문에 심한 외풍이 몰아쳐 자율적인 활동을 제약받게 된다. 그러나 이 같은 와중에 스포츠부문만은 가장 괄목할만한 족적을 남기면서 태평성대를 누렸다는 것은 아이로니컬하다.
한국은 이데올로기가 가장 첨예화된 동북아의 분단국이란 핸디캡 속에서도 아시아에선 두 번째로 올림픽을 유치해 완벽한대회로 치러냈다. 유치 때는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었으나 전국민의 성원과지지 속에 개최돼 올림픽사상 「최상·최고의 완벽 올림피아드」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서울올림픽은 국가발전에도 커다란 역할을 해 북방외교의 기틀이 됐으며 「마의 벽」처럼 느껴지던 공산권의 문호가 활짝 열렸다.
또 80년대에는 프로야구·프로축구·민속씨름 등이 출범, 본격적인 프로스포츠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프로야구는 지역감정의 촉발이란 관점에서 비판도 있었으나 이젠 노소를 막론하고 가장 사랑 받는 스포츠로 발돋움했다.
흔히들 5공화국을 스포츠공화국이라고 혹평한다. 올림픽메달리스트 중에는 여고생이 매월1백만원이 넘는 경기력 향상기금을 받는가 하면 프로야구의 스타 중에는 연봉 1억원에 가까운 재벌선수가 나오기도 했다.
◇88서울올림픽
1981년9월30일 자정께(한국시간) 서독 바덴바덴 IOC총회에서 『세울 코레아』가 울려퍼지자 이를 TV로 지져보던 국민들은 환희보다도 경악과 충격 속에 빠졌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당시 5공화국은 단군이래 최대제전으로 불린 이 엄청난 대역사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국민적 합의 없이 밀실정책으로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많은 국민들은 『이 어려운 상황에서 경제적 파국을 몰고 오는 것이 아닌가』라며 우려를 표시했다. 또 재야의 정치인 혹은 반체제인사들은 『철권정치로 인한 국민들의 반발심리를 무마하기 위한 우민화정책』이라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당시 국내 시국은 5공화국의 일대 숙정작업으로 냉랭한 분위기 속에 몹시 위축되어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올림픽유치를 발표하자 국민들의 호응을 받기가 어려웠고, 감히 한국으로 유치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반신반의 속에 11월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아시아경기연맹(AGF)총회에서 서울이 86아시안게임개최지로 만장일치 의결돼 한국은 「세계의 초점」으로서 대장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올림픽개최는 순탄치 않았다. 서울올림픽유치가 확정되면서 궁지에 몰린 북한은 그동안 지속적으로 개최지 변경을 획책해왔다.
특히 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소련을 주축으로 한 공산블록이 불참하게 되자 서울올림픽은 최대의 위기를 맞게된다. 사마란치 IOC위원장도 『서울개최는 확고하다』고 천명하면서도 일부 IOC위원들의 끈질긴 개최지변경 주장에 대해 『앞으로 올림픽개최지 선정에 앞서 후보국의 정치상황이 검토돼야한다』고 말할 정도로 궁지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LA올림픽이 끝난 후 10월 모나코에서 열린 하계올림픽종목 국제경기연맹연합회총회는 88서울올림픽의 개최를 전폭적으로지지, 이에 적극 협조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어 12월 제89차 IOC임시총회는 서울올림픽 개최를 재확인하고 모든 회원국의 올림픽참가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 북한측의 책동에 쐐기를 박았다.
개최지변경이 저지되자 북한은 85년7월 평양방송을 통해 남북한이 서울과 평양에서 올림픽대회를 분산 개최하고, 남북한단일팀을 출전시키자고 제의해와 파문을 일으킨다.
이에 따라 사마란치 IOC위원장의 주선으로 10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로잔에서 남북체육회담이 열리지만 결국 소득 없이 끝난다. IOC는 일부 4개 종목의 북한개최를 종용, 한국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북한은 엉End하게 공동개최를 요구하다 결국 결렬된 것이다. 사마란치 위원장이 IOC규정을 어기며 남북체육회담을 주선한 까닭은 공산권의 불참위협을 불식시키는데 있었다.
특히 85년11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13개국 체육장관회의는 서울올림픽의 남북한분산개최안에 대해 북한·쿠바를 제외한 11개국이 반대함으로써 서울올림픽개최를 확고히 해주었다. 한국은 LA올림픽이 열릴 때만해도 서울올림픽도 반폭 올림픽이 되리라고 예상할 정도였다.
공산권이 서울올림픽에 출전한 것은 순전히 그들 나라들의 국익에 유리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서울올림픽 후 소련·동독을 위시해 봇물처럼 터진 동구공산권의 민주화 물결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공산국가들은 LA대회에 이어 서울올림픽마저 보이콧할 경우 그들 나라의 체육인들은 물론 국민들의 욕구불만을 촉발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간과할 수 없었다.
1백67개 IOC회원국 가운데 1백60개국 1만3천여명의 선수단이 참가한 서울올림픽은 76년 몬트리올대회이후 12년만에 처음으로 동서양진영이 모두 참가하는 완전 올림픽으로 신기원을 이룩하게 된다.
23개 종목 2백37 세부종목이 펼쳐져 세계최고기록 36개, 올림픽최고기록 2백27개가 쏟아진 이 대회에서 한국은 약간의 텃세는 있었지만 금12·은10·동메달 11개로 소련·동독·미국에 이어 세계 4강에 진입하는 위업을 세우게 된다.
석연치 않은 동기에서 유치된 서울올림픽은 결과적으로 국가발전에 엄청난 기폭제가 되었다.
유럽지역에 주재하던 한 외교관은 『외교관이 1백년 안에 이룩할 수 없는 일을 서울올림픽이 해결해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올림픽 개최로 부수적으로 파생된 국제 정치적, 사회 문화적, 경제적 성과는 뚜렷이 눈에 보였고 피부에 와 닿았다.
한국은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북한에 대해 항구적인 우위를 확보, 남북한관계는 동서독의 유형으로 발전하게 될 것으로 평가되고있다.
한국은 분단국과 개도국이라는 제약에도 불구, 올림픽을 완벽하게 치러냄으로써 개도국들에 발전의 모델국가로 부각되어 이들 국가들과 통상을 확대하고 외교적 협조체제를 구축하는데 이미 크게 기여하고 있다.
특히 북방외교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돼 88년10월 헝가리를 비롯, 폴란드·유고 등 3개 공산권국가와 스포츠교류협정을 맺게됐다.
또 소련·중국과의 외교관계도 더욱 부드러워진 것은 물론이다.
올림픽개최로 국민의식의 선진화에도 결정적 계기를 맞게됐다. 한국은 급속한 경제적 발전으로 계층간·지역간의 마찰계수가 높았다. 이런 상황에서 모두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올림픽과 같은 대행사를 개최, 공동의 목표를 설정함으로써 애국심은 물론 협동심을 고취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생산소득 및 고용효과의 유발, 산업별 파급효과 등은 물론 관광·스포츠레저산업의 성장과 전자·통신부문의 기술을 향상시키는 부수적 효과를 가져왔다. 82년부터 88년까지 7년 동안 직접적인 올림픽관련사업에만 4조7천5백4억원의 총생산 유발효과와 1조8천4백62억원의 소득유발효과를 거둬들였다는 것이 한국개발원(KDI)의 분석이다. 이는 이 기간 GNP의 0·4%에 해당된다. 특히 서울올림픽은 TV방영권 판매 등 의학수입이 많아 국제수지 개선효과가 4억3천4백만달러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프로 스포츠
80년대 이전에는 프로스포츠라 할 수 있는 종목은 프로복싱·프로골프 등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81년5월 서울 올림픽유치대책으로 부산한 와중에 5공화국의 최고통치자인 전두환 대통령은 축구와 야구의 프로화를 지시했다. 이는 올림픽유치에 실패할 경우에 대비한 통치차원적 스포츠정책으로 풀이됐다. 외관상으로는 국민들의 여가를 선용케 한다는 것을 표방했으나 당시 사회 각 부문에 몰아친 정화선풍 등 억눌린 분위기 속에 착상된 「지혜로운 대중선무공작」이었다.
프로야구 실무진은 서울, 경기·강원, 충남북, 전남북, 대구·경북, 부산·경남 등 6개 지역을 프랜차이즈로 한 프로야구리그창설계획을 추진, 11월21일 삼성·해태·롯데·삼미·OB·MBC 등 6개 구단의 출범을 확정지었다.
야구보다 1년 후에 시작된 축구와 씨름 등 두 경기의 프로화에는 KBS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 KBS는 두 종목의 TV중계를 전담하는 조건으로 매년 1억5천만∼2억5천만원 가량씩을 지원키로 한 것이다.
프로축구는 당초 할렐루야·유공·현대·대우·럭키금성·포철 등 6개 구단으로 시작, 할렐루야가 도중 해체되고 89년부터 일화가 가세했다.
반면에 프로야구는 86년 빙그레, 또 올해 쌍방울의 가세로 8개 팀으로 늘어나는 등 대조를 이루고있다. 프로야구는 원년인 82년에 총 관중수가 1백43만8천여명에 이르렀으나 매년 증가, 89년에는 두 배가 넘는 2백88만3천여명을 기록하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프로축구는 원년인 83년 42만명의 관중이 85년 20만명까지 곤두박질, 89년에 54만9천여명의 관중을 겨우 끌어 모았다. 이 같은 양상은 양 기구의 조직 및 운영면에서 비롯된다는 분석이다. 야구는 처음부터 선수선발의 연고지제도와 프랜차이즈제도(본거지제도)를 채택, 지역감정촉발이란 부정적 시각도 있지만 관중동원에는 성공할 수가 있었다.
축구는 이 같이 연고지제도를 채택치 않음으로써 관중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 것이다. <이민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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