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트루먼 대통령, 중 국민정부에 원조 중단 보복” 소문

중앙선데이

입력 2021.08.21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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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0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90〉 

1948년 10월, 베이핑 고궁박물원 앞에 나타난 듀이 지지 선전원. [사진 김명호]

1948년 10월, 베이핑 고궁박물원 앞에 나타난 듀이 지지 선전원. [사진 김명호]

미국은 단명으로 그친 쑨원(孫文·손문)의 임시 대총통 시절부터 국민정부를 지지했다. 1927년 4월, 중공과 결별한 북벌군 사령관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난징(南京)에 딴살림 차린 후엔 더 견고해졌다.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가깝기가 말도 못할 정도였다. 미국은 자금과 물자를, 중국은 인력을 쏟아부었다. 일본 패망 후 벌어진 국·공전쟁 말기, 미국은 국민정부에 원조를 중단했다. 국민정부가 대륙에 집권하는 것이 미국엔 이익이었다. 신흥세력인 중공은 다룰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미국은 국민정부에 등을 돌렸다. 여러 이유가 있었다.

1948년 미 대선 트루먼-듀이 구도
장제스는 특사 보내 듀이 지지 약속
트루먼, 열세 여론 뒤집고 연임 성공

“국민정부의 몰락은 부패와 무능 탓
그들이 갈 곳은 감옥 외에는 없다”
트루먼, 장제스 겨냥해 독설 퍼부어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통치수단이 야비하고 잔인했다. 민심을 잃었다. 군심(軍心)은 더 일찍 상실했다. 사기가 엉망이다 보니 미국이 지원한 신무기도 쓸모가 없었다. 미국이 국민정부를 포기했을 때도 국민정부군은 강군(强軍)이었다. 장강(長江) 이남에 웅거해 반격을 준비할 여력이 충분했다. 문제는 장제스와 그 수하들의 무능과 판단 착오였다.

국·공전쟁 말 국민정부 민심 잃어

일본 패망 후 광저우(廣州)의 공군기지에서 열린 미·중 합동 성탄 절 파티. [사진 김명호]

일본 패망 후 광저우(廣州)의 공군기지에서 열린 미·중 합동 성탄 절 파티. [사진 김명호]

1948년, 미국 대선은 민주당 경선을 통과한 대통령 트루먼과 공화당 후보 토마스 듀이의 대결이었다. 장제스는 뉴욕주 지사 듀이의 정견에 흥분했다. “미국 정부는 얄타에서 소련과 비밀협정을 체결했다. 소련이 중국의 동북과 화북지역에 진출할 통로를 열어줬다. 공산주의자는 물론, 공산주의자와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 정부의 요직을 맡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확장을 막으려면 장제스의 국민정부를 지원해야 한다.” 대학에 침투한 중공 지하당원들이 개미처럼 움직였다.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 학생 1000여 명이 거리로 나왔다. 미국원조 거절한다는 시위가 그치지 않았다.

1933년부터 16년간 집권한 민주당에 미국인들은 싫증이 났다. 기업인들이 공화당 쪽으로 기울었다. 듀이는 선거자금이 부족하지 않았다. 트루먼이 듀이와 공화당을 공격했다. “월 스트리트는 자신들의 돈을 물 쓰듯 하는 특권자가 선거에 이기기를 희망한다. 공화당도 국민을 위한 정당과는 거리가 멀다.” 여론조사기관은 듀이의 압승을 예측했다. 영향력 있는 언론인 50여 명도 트루먼의 패배를 예상했다. 트루먼은 선거에 적극적이었다. 열차로 전국의 작은 역을 순회했다. 356차례 명연설로 1200만 명의 유권자를 홀렸다. 듀이는 활동이 저조했다. 접근했던 사람이 톈진(天津)에 있는 중국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팔자 수염을 한 듀이의 인상은 영화에 나오는 악마 같았다. 연설도 무미건조하고 재미가 없었다. 세균 감염을 두려워하다 보니 악수하자고 손 내미는 자원봉사자들을 혐오한다.”

중공 동북야전군 입성 직전, 창춘(長春)의 포드자동차 대리점. [사진 김명호]

중공 동북야전군 입성 직전, 창춘(長春)의 포드자동차 대리점. [사진 김명호]

다들 공화당의 승리를 노래했다. 듀이는 추가 자금 모금이 쉽지 않았다. 장제스는 듀이를 지원하기로 작심했다. 1948년 여름, 최측근을 미국에 파견했다. 장의 특사를 만난 듀이는 감격했다.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장 위원장의 도움에 감사한다. 내가 당선되면 위원장에게 불리한 전국(戰局)이 바뀌도록 진력하겠다. 중국 경내의 공산당을 철저히 소멸시켜 위원장의 총통직 수행이 원만하도록 하겠다.” 중국인들은 1948년 미국 대선을 여상지쟁(驪象之爭), 민주당과 공화당의 상징인 당나귀와 코끼리의 전쟁이라고 불렀다. 고도 베이핑(北平)에 코끼리 인형과 듀이의 초상화 들고, 이상한 악기 연주하며 듀이의 당선을 기원하는 도사(道士) 복장의 지지자까지 등장했다.

린뱌오(林彪·임표)가 지휘하는 중공 제4야전군의 동북 석권 2개월 후, 미국 대선은 트루먼의 승리로 끝났다. 선거자금은 210만 달러를 쓴 공화당보다 민주당이 60만 달러를 더 썼다. 인도네시아의 화교가 운영하는 좌파신문 사설 〈트루먼 승리의 의의〉가 시선을 끌었다. “전 세계의 전쟁상인과 전쟁광들은 트루먼 대통령의 연임에 실망했다. 장제스가 국민정부 입법원 부원장 천리푸(陳立夫·진립부)를 통해 듀이에게 지원한 150만 달러는 물거품이 됐다. 장이 만지작거리던 두 장의 카드, 듀이의 당선과 세계대전 폭발도 허공으로 사라졌다.”

장제스, 듀이에게 150만 달러 지원

태평양전쟁 시절 미국 정부는 미국 거류 일본인들을 격리 수용했다. 일본인으로 오해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중국 국기 꽂아놓고 일광욕 즐기는 중국 여인. [사진 김명호]

태평양전쟁 시절 미국 정부는 미국 거류 일본인들을 격리 수용했다. 일본인으로 오해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중국 국기 꽂아놓고 일광욕 즐기는 중국 여인. [사진 김명호]

천리푸는 회고록에서 1948년의 미국 방문을 인정했다. “목적은 민주정치 참관이었다. 트루먼 대통령과 국방부장, 재정부장, 양당의 영수들을 만났다.” 공화당 영수가 듀이였는지 여부는 밝히지 않았다. 한동안 미국이 중국에서 손을 뗀 이유가 트루먼의 보복이라는 설이 파다했다. 대선이 끝나기 몇 개월 전부터 트루먼 정부는 국민정부의 몰락을 인정했다. 조지 케넌이 이끈 국무부 정책연구실의 보고가 결정적이었다. “우리의 중국정책에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장제스를 계속 끼고 가는 것은 현명한 외교가 아니다. 지금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선택의 여지가 없을까 우려된다.”

트루먼의 구술에 이런 내용이 있다. “대륙에서 국민정부의 몰락은 부패와 무능 때문이었다. 우리는 약 30억5000만 달러의 군사장비를 소위 자유중국 인사라는 사람들에게 지원했다. 동북에서 베이징을 거쳐 난징까지 모든 전선에서, 장제스의 500만 대군은 공산군 30만에게 패했다.” 트루먼의 독설은 거침이 없었다. “장제스와 그 수하들이 미군 수백만을 파견해 구해달라는 요청을 한 적이 있다. 나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부패와 무능을 타고난 사람들을 위해 단 한 명의 미군도 희생시킬 수 없다. 나를 공산주의에 관대하다고 질책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지적에 절대 굴복하지 않았다. 장과 그의 패거리들은 자신들의 방법을 바꾸려 한 적이 없다. 그런 인간들이 갈 곳은 감옥 외에는 없다.”

2003년 10월 말,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이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뉴욕타임스에 이런 글이 실렸다. “트루먼은 장제스와 주변 인물들을 도적 취급했다. 미국이 원조한 수십억 달러 중 7억5000만 달러를 빼돌려 브라질의 상파울루에 투자했다. 심지어 지금 우리가 밟고 다니는 뉴욕에도 부동산이 있다.” 트루먼은 독설가였다. 빈말은 안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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