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서 배우는 생존 이치

노루가 자기 방귀에 놀라고, 호랑이가 병든 듯 걷는 까닭

중앙선데이

입력 2021.08.21 00:02

업데이트 2021.08.27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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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0호 15면

자연에서 배우는 생존 이치

서광원칼럼 8/21

서광원칼럼 8/21

‘노루는 자기 방귀 소리에 놀라 십 리를 도망간다’는 말이 있다. 겁 많은 노루를 빗대 지레 겁먹는 걸 이를 때 쓰는 말이다. 노루는 왜 이런 바보 같은 행동을 할까. 그리고 진짜라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았을까. 진화는 바보 같은 행동을 하는 생명체를 가차 없이 걸러내는데 말이다. 우리에게는 바보처럼 보이지만 노루 입장에서는 아닐 수 있다.

노루, 무자비한 포식자 피하려고
바람 소리에도 줄행랑 치게 진화

호랑이, 힘빼고 무심한 듯 어슬렁
먹잇감 방심하도록 해 사냥 성공

무작정 달려드는 건 실패 지름길
몸 낮추고 절호의 기회 만들어야

이제는 한반도에서 야생 호랑이를 볼 수 없지만, 수백만 년 동안 노루는 호랑이의 먹이였다. 우리가 백두산 호랑이라고 부르는 시베리아 호랑이는 그림자처럼 다가와 벼락 같이 덮치는데 일가견이 있다. 이런 호랑이가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데, 무슨 소리가 났을 때 무시한다면 생존하기 어렵다. ‘지나가는 바람 소리겠지’라고 생각하거나 ‘아까까지 아무 일 없었는데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 하고 넘기기 보다 자기 방귀 소리라도 일단 안전한 거리까지 피하고 보는 게 생존에 유리했을 것이다. 그러니 거의 모든 노루들이 이런 성향을 갖게 됐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바보짓 같아도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바람처럼 피하고 보는 조심성이 노루들을 살린 것이다. 물론 노루들이 이럴수록 호랑이의 삶은 피곤해진다. 천하의 호랑이라도 먹어야 산다. 그래서 노련한 호랑이들은 아주 의뭉한 전략을 쓴다. ‘채근담’이라는 책에도 나와 있는 응립여수 호행사병(鷹立如睡 虎行似病)이다. 매는 조는 듯이 앉아 있고 호랑이는 병든 듯 걷는다는 뜻이다. 매는 ‘매의 눈’이라는 말처럼 날카롭게 노려보아야 정상이고 호랑이는 위풍당당하게 걷는 게 당연한데 왜 매는 조는 듯이 앉아 있고 호랑이는 병든 듯 걷는다고 할까. 질문을 반대로 던지면 답이 보인다.

만일 매가 예리한 눈초리를 번득이고, 호랑이가 몸에 힘을 주어 걸으면 다른 동물들에게는 신호를 주게 된다. 항상 이들과 멀리 떨어져야 신상에 이로운 노루나 사슴들에게 이 모습은 위기의 징조로 해석할 수 있다. 조만간 생과 사를 가르는 위험이 자신들에게 닥칠 것이라는 신호다. 신호를 보고 바람처럼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생각해보자. 평소 한 성격 하는 상사의 행동이 예사롭지 않은데 ‘별 일 있겠어? 저러다 말겠지’라고 생각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자기 방귀 소리에 놀란 노루가 일단 십 리쯤 달아나듯 미리미리 조심하는 게 좋을까? 자세히 말할 필요도 없다.

노련한 매와 호랑이는 조는 듯 앉아 있고 병든 듯 걷는다. 그래야 사냥감들이 경계심을 풀 것이고, 배가 고플 때 쉽게 사냥감을 찾을 수 있는 까닭이다. 특히 산전수전 다 겪은 호랑이들은 힘을 쭉 빼고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닌다. ‘지금은 배가 불러서 너희들에겐 관심이 없어’라는 제스처를 온몸으로 보이면서 말이다. 물론 풀린 눈 속의 예리함으로 주변 상황을 전방위로 ‘스캔’ 하는 건 당연지사다.

이렇게 어슬렁거리다가 괜찮은 대상을 발견하면 슬슬 따라간다. 목표물의 행동을 잘 관찰할수록 그들의 패턴을 알 수 있다. 패턴을 알면 목표 달성이 쉬워진다. 맹수는 조용히 기회를 만든다. 물론 이것만으로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 무심코 밟은 나뭇잎이 바스락거려 다 된 밥이 어그러질 수도 있다. 나무 위의 원숭이들이 소리를 질러 산통을 깨기도 한다. 사슴들 또한 아무리 배가 고파도 한 녀석은 반드시 주변을 살핀다.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킁킁 하는 ‘경계경보’를 발령해 호랑이의 존재를 알린다.

재미있는 건 사냥감들에게 들켰을 때 호랑이의 태도다. 멋쩍은 듯 먼 산을 쳐다보며 딴청을 부린다. 모든 증거가 완연한데도 오리발을 내미는 ‘발 연기’를 한다. 아닌 척하는 것이다. 다르게 보면 밀림의 제왕도 이런 노력을 해야 살아갈 수 있다는 얘기다. 반면 초보 호랑이는 호랑이답게 힘을 잔뜩 주고 다닌다. 하지만 이 때문에 먹고 사는 일은 어려워진다. 경쟁자만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사냥감도 사라지니 말이다. 호랑이답지 않아야 잘 살 수 있다는 묘한 역설이다. 쓸데없이 주목받는 것만큼 쓸데없는 것도 없다.

호랑이들의 세상에서 힘을 빼고 어슬렁거릴 수 있다는 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아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할 때 상황을 내 편으로 만들어 놓고 시작할 줄 안다는 것이고 절호의 기회를 만들 줄 아는 노련함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호랑이니까, 배가 고프니까 일단 달려보자고 하는 건 굶어 죽는 지름길이다. 사냥감들도 수백만 년 동안 학습해 온 실력이 있다. 쉽게 잡히지 않는다. 실제로 호랑이의 사냥 성공률은 최선을 다해도 10% 정도다. 열 번을 쫓아가면 한 번 성공하는 것이다. 그러니 무작정 쫓아가는 건 실패를 쫓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도 힘을 뺄 줄 아는 호랑이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호랑이답게 힘주고 다니는 이들이 있다. 누가 잘 하고 있는지는 시간이 알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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