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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다, 곧 인터넷 끊긴다" 21세기 카불판 '안네의 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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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너무 무섭다. 여기서 어떻게 탈출해야지, 어디로 가야지, 어떻게 가야지만을 생각한다.’
아프가니스탄 소녀의 글에선 공포감이 묻어났다.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 사는 10대 여학생 A는 탈레반이 통신을 끊을 것이라는 말에 두려움을 느끼며 이런 일기를 썼다. 전기까지 끊기면 휴대전화도 충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유일하게 소녀를 안심시켜 준 휴대전화와 SNS를 하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운 마음이 일기에 적혀 있었다.

카불에 사는 아프가니스탄 소녀의 일기. 신분 노출 우려가 있어서 메신저 화면을 그래픽으로 재구성했다.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카불에 사는 아프가니스탄 소녀의 일기. 신분 노출 우려가 있어서 메신저 화면을 그래픽으로 재구성했다.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인터넷 곧 끊을 것”이라며 보내온 일기

한류에 관심이 많은 A는 서툰 한국어로 최근까지 중앙일보와 SNS로 소통을 했다. 짤막한 일기를 보내온 시간은 현지 시각으로 19일 오전 1시. 새벽에 쓴 일기가 한국 시각 19일 오전 5시 30분에 기자의 SNS로 전해졌다. “우리 연락이 언제 끊길지 모르니 지금 말하겠다”는 말과 함께였다.

메시지의 절박함은 『안네의 일기』를 연상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나치 정권의 탄압을 숨죽이며 기록한 유대인 소녀처럼 A는 탈레반의 공포가 세상에 알리고 있었다.

카불을 순찰하는 탈레반 조직원들. AP=연합뉴스

카불을 순찰하는 탈레반 조직원들. AP=연합뉴스

자정이 넘어서도 잠들지 못한 A는 일기에서 “너무 무섭다”고 했다.
“탈레반이 길에 많아서 집에서도 나가지 못한다. 전기도 없어서 (충전을 못 해) 휴대전화 배터리가 없다. 신용카드도 없어서 친척에게 어떻게 연락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오늘은 탈레반이 카불 공항에서 8명을 죽였고, 칸다하르에서 4명을 죽였다고 한다. 이제는 더 무섭다.”

A가 전한 바에 따르면 카불 주민들 사이에선 “탈레반이 통신을 사용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일기를 보내기 약 5시간 전에도 기자에게 “(탈레반이) 다음 주부터 휴대전화·전화·인터넷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문자를 보냈다. “100% 확실한 건 아니지만, 주민 사이에서 그런 말이 나오고 있다”면서다. A는 “내 답장이 없으면 궁금해 할까 봐 그 이유를 미리 알려주려고 먼저 연락했다”라고도 했다.

“12세도 탈레반과 결혼…탈출하겠다”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이 18일 터키 동부 한 시골에 앉아 있다. AP=연합뉴스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이 18일 터키 동부 한 시골에 앉아 있다. AP=연합뉴스

K팝을 사랑해 2019년부터 한국어를 공부한 A는 탈레반 사태 이후부터 기자와 메신저를 주고받았다. 어려운 표현은 구글 번역기를 쓰기도 했지만, 한국말 소통에 문제가 없었다. ‘ㅋㅋ’ ‘ㅠㅠ’ 등의 인터넷 용어도 썼다. 탈레반의 만행을 전할 때는 뒤에 ‘ㄷㄷ’를 붙였다. A의 꿈은 “언젠간 좋아하는 아이돌을 보러 한국에 가는 것”이었다.

첫 대화 때만 해도 A는 “카불은 지금까지는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라고 전했지만, 이후 급격하게 불안감이 커졌다. “탈레반이 아프간 여자들과 결혼한다고 한다. 남편이 있든 말든 상관없이 12~45세 여성이 그 대상이라고 들었다”고 했다.

A와 가족은 필사의 탈출을 결심한 상태지만, 카불이 점령된 뒤엔 줄곧 집에만 있다고 했다. 급변하는 상황에서 여성이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다. SNS를 쓰는 것도 점점 조심스러워지면서 A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휴대전화로는 못 한다. 이해해달라. 이름도 정확히 알려주고 싶지만, 너무 무서워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러던 중에 마지막으로 일기를 보내온 것이다. “꼭 다시 만나자”는 기자의 마지막 메시지엔 아직 답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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