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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한국외교를 따라다니는 신뢰의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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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위성락 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장

위성락 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장

한·미 연합훈련에 대한 김여정의 담화는 한국 외교의 해묵은 문제 하나를 소환했다. 신뢰의 문제다. 김여정은 한국 당국자의 배신적 처사에 유감을 표했다. 배신이라는 표현은 나라 사이에서 좀처럼 쓰지 않는 극단적인 용어다.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든다. 더구나 정부가 이런 말을 듣고도 북측에 대해 아무런 대응을 안 하니, 말 못할 사연이 있으리라는 의구심은 더욱 커진다.

당파적 편의적 정책으로는 #외교의 신뢰성 도전 받아 #외교 개혁 여론을 일으켜 #퇴영적 외교를 떨쳐낼 때

아마도 지난 수개월간 진행된 남북 정상 간 친서 교환 과정에서 우리 측이 연합훈련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언질 비슷한 것이라도 북한에 준 것은 아닌지 추측을 하게 된다.

지나친 추측이라고 치부하는 분께는 한국 외교에서 이런 일이 빈번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때도 우리 측은 북·미 간에 중간 역할을 자임하면서 미국 쪽 사정을 북한에게 설명했다. 세간에 알려진 바로는 그 과정에서 우리 측이 타결에 대한 북한의 기대를 부풀렸는데 정작 미국이 협상을 결렬시키자, 북한은 한국이 실상을 오도했다며 분개했다는 것이다. 하노이 이후 남북 접촉이 끊어진 배경에 우리의 어설픈 중매쟁이 역할이 있었다는 것은 널리 회자되는 해석이다.

혹자는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정부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집중하다가 생긴 일이므로, 특이한 상황에 처한 정부와 괴팍한 북한 사이에 벌어진 예외적 사례로 보아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맞지 않는 해석이다. 유사한 사례가 과거 우리 정부와 북한 이외의 나라 사이에서도 자주 발견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개 만 소개한다.

박근혜 정부 때 우리가 주한미군의 사드 배치를 허용하자, 중국 외교부장은 공개리에 한국이 신의를 저버리는 행동을 했다고 일갈했다. 배신이라고 말한 셈이다. 우리는 공개적인 대외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중국에게 무슨 말을 해왔기에 중국이 이렇게 나오는 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에게는 나서서 반박 못할 사연이 있어 보였다.

또 역대 정부는 러시아에 대해 가스관, 전력망, 철도망 구축 등 거대 프로젝트를 제기하고 실제 진전은 이루지 못하는 행태를 반복했다. 러시아 측이 이런 접근을 보고 신뢰성에 의문을 품은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사실 여부를 떠나서 배신이니 신의를 저버리느니 하는 말은 역대 정부가 여기저기서 들어온 오명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한국 정도의 국제적 위상을 가진 나라 중에 다른 나라로부터 이런 말을 이처럼 자주 듣는 나라가 없다.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는 나라도 없다. 한국 외교의 폐습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유사한 비난의 소지가 있는 사안 또 하나가 떠오르고 있다. 사드 관련 3불 문안의 의미에 관한 논란이 그것이다. 사드 3불 문안은 청와대가 주도하여 중국과 조율했고 외교부 장관이 국회 외통위에서 공표했다. 그런데 근자에 정부 측 인사들은 이것이 약속이 아니라 협의였으니 꼭 지킬 필요는 없다는 취지의 언급을 하고 있다. 필자는 사드 3불과 같이 우리 안보에 제약이 될 입장을 섣불리 공표한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약속이든 협의든 정부가 중국과 조율하여 입장을 공표한 이상, 여기서 이탈하려면 체계적이고 설득력 있는 외교적 논의 과정을 통해서 빠져 나와야 한다고 본다. 그런 과정 없이 임기 말에 말 바꾸는 식으로 발 빼려하다가는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우려가 있다.

왜 한국 외교는 계속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정책 결정 과정에서 당파적 이념적 이해관계나 인기를 우선시하는, 정치화되고 편의적인 관점이 득세하기 때문이다. 합리적이고 실용적으로 국익을 추구하려는 외교 본연의 관점이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G7 반열에 있는 나라 중 이런 식의 외교를 하는 나라는 없다. G20 중에도 없다. 더 냉정히 말하면 선진국 중에는 하나도 없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경제력을 기준으로 할 때는 선진국에 들어가지만, 외교의 품격을 기준으로 하면 선진국 축에 못 낀다.

이런 기막힌 상태를 방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부심 강한 우리의 젊은 세대에게 이런 모습의 외교를 물려주어서도 안 될 것이다. 기성세대에게는 하루 빨리 구태 외교와 결별하는 작업을 시작해야할 책임이 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외교에 이런 퇴영적인 취약점이 있다는 문제 의식이 공유되어야한다. 만일 정치 엘리트가 이에 공감하고 문제 해결에 나선다면 이 작업은 추동력을 얻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이 문제에 관해 여론을 환기하고 사회적 담론을 일으키는 것이 다음으로 할 일이다. 외교안보 커뮤니티에서부터 논의를 확산시킬 필요가 있다.

김여정이 내놓은 비난은 근거가 있든 없든 간에 한국 외교의 이면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한국 외교에 신뢰의 문제가 따라다니는 것은 사실이다. 떨쳐버려야 할 폐습이다. 차제에 한국 외교에 가해진 오명을 외교 개혁의 동력으로 승화시킬 사회적 논의가 촉발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