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개 캐다 발견한 조선왕실 고오급 기와···완전한 취두는 처음

중앙일보

입력 2021.08.19 14:34

업데이트 2021.08.19 15:03

태안 청포대 해수욕장 갯벌에 파묻힌 채로 발굴된 조선시대 장식기와 '취두'의 윗부분. 올해 초 발굴조사 당시 모습이다. 취두 위쪽으로 뻘이 50cm정도 덮인 채로 발견됐다. 사진 문화재청

태안 청포대 해수욕장 갯벌에 파묻힌 채로 발굴된 조선시대 장식기와 '취두'의 윗부분. 올해 초 발굴조사 당시 모습이다. 취두 위쪽으로 뻘이 50cm정도 덮인 채로 발견됐다. 사진 문화재청

“여기 청포대랑 달산포 사이 해변인데요, 조개 캐러 나왔다가 용머리 모양 큰 유물같은 걸 찾았는데, 한 3시간 팠는데 꺼내질 못하겠어요”

2019년 9월 19일, 태안 해경에 걸려온 이 한 통의 전화가 발굴작업의 시작이었다.

국립태안해양유물전시관은 19일 “태안 갯벌에서 조선 전기 왕실 지붕 장식기와 4점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2019년 9월부터 올 6월까지 태안 청포대해수욕장(남면 원청리) 갯벌에서 발굴한 장식기와는 왕실 건물 지붕 모서리에 얹는 용도로, 용머리모양 취두 3점과 장수상(잡상) 1점이다. 조선 전기 취두가 완전한 형태로 발굴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120㎏ 기와, '화재 예방' 기원해 용 새겼다

왕실 건물 지붕 장식기와 명칭(창덕궁 명전문). 취두는 기와지붕 모서리에 무겁게 얹는 장식기와인데, 장식 이외의 기능은 없다. 자료 문화재청

왕실 건물 지붕 장식기와 명칭(창덕궁 명전문). 취두는 기와지붕 모서리에 무겁게 얹는 장식기와인데, 장식 이외의 기능은 없다. 자료 문화재청

취두(鷲頭)는 독수리 취(鷲), 머리 두(頭)를 써서 ‘독수리머리 모양 기와’를 일컫는다. 이름은 독수리머리지만 용머리 문양이 더 많다. 김성구 전 경주박물관장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새 깃모양 '치미'와 화재를 막는 의미를 담아 용을 형상화한 통일신라 말 '치문'을 거쳐 고려 말 등장한 '취두'에도 용 문양이 남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태안 갯벌에서 발굴된 조선전기 취두. 아래쪽의 용머리모양과 위쪽의 소룡모양, 두 부분으로 나뉜다. 따개비의 흔적이 남아있다. 사진 문화재청

태안 갯벌에서 발굴된 조선전기 취두. 아래쪽의 용머리모양과 위쪽의 소룡모양, 두 부분으로 나뉜다. 따개비의 흔적이 남아있다. 사진 문화재청

취두는 기와지붕 모서리에서 안정성을 더하기도 하지만, 주로 ‘장식용’이다. 용을 그린 최고급 기와로, 세자도 못 쓰고 왕이 쓰는 건물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아래의 용머리 부분과 위쪽의 소룡을 새긴 부분, 둘로 나뉘어있다.

취두는 처음부터 나눠서 만들지 않고, 한 덩어리로 새겨 만든 다음 둘로 나눠 가마에 굽고, 하나씩 지붕 위에 올려 조립한다.

굳이 잘랐다가 구운 뒤 지붕 위에서 결합시키는 이유는 '크고' ‘무거워서’다. 이번에 발견된 취두는 높이 103㎝ 크기에, 무게도 아래‧윗부분이 개당 50~60㎏로 합치면 120㎏가 넘는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이인숙 학예연구관은 "워낙 큰 기와라, 가마에서 안쪽까지 잘 굽기 위해선 반 잘라 굽는게 유리했다"고 설명하고, 양기홍 연구사는 “건축물의 위대성을 보여주기 위한 용도다보니 크고 무겁게 만들지만, 사람이 직접 지붕 위로 들고 올라가기 위해선 무게를 나눌 수 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광화문역에 위치한 고종즉위 40년 칭경기념비 누각 지붕 위에도 간략한 형태의 취두와 잡상이 얹혀있다. 김정연 기자

광화문역에 위치한 고종즉위 40년 칭경기념비 누각 지붕 위에도 간략한 형태의 취두와 잡상이 얹혀있다. 김정연 기자

"못 꺼내겠다" 부표로 표시하고, 해경 배 타고나가 끌어올렸다 

2019년 10월 태안 갯벌에서 발견된 조선 초기 장식기와 '잡상(장수상)'. 따개비 흔적이 남아있다. 장수상을 발견한 덕에 유물 발굴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다. 사진 문화재청

2019년 10월 태안 갯벌에서 발견된 조선 초기 장식기와 '잡상(장수상)'. 따개비 흔적이 남아있다. 장수상을 발견한 덕에 유물 발굴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다. 사진 문화재청

2019년 신고자가 최초로 발견한 취두는 두 부분 중 아랫부분으로, 신고인은 “조개 캐러 나왔다가 오전 10시에 처음 보고 서너시간 팠는데 깊이 묻혀있어서 꺼내질 못하고, 부표를 묶어뒀다”며 태안 해경에 전화로 도움을 요청했다. 출동한 해경이 신고자와 함께 배를 타고 나가 부표를 끌어올려 취두를 수습했고, 태안군청을 거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로 곧장 옮겨졌다.

신고는 꽤 들어오지만, 발견은 "억세게 운이 좋았다"

태안 왕실 장식기와 발굴지점. 자료 문화재청

태안 왕실 장식기와 발굴지점. 자료 문화재청

서해안과 남해안을 통틀어 해마다 10건 정도 유물 발견 신고가 들어오는데, 실제 발굴로 이어지긴 쉽지 않다. 이번 취두 발견지점도 ‘청포대~달산포 사이 해변, 바다쪽으로 1~2㎞ 지점’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지만, 2019년 10월 신고인과 함께 기억을 더듬어 다시 현장에 나갔을 때 장수상을 발견한 덕에 위치를 특정해 추가 발굴조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양기홍 연구사는 “조개 캐다가, 놀다 도자기 조각을 주웠다 등 신고는 꽤 들어오는데, 같은 위치를 찾기는 그야말로 ‘해수욕장에서 바늘찾기’”라며 “이번에는 운좋게도 신고 지점 주변에서 다른 장식기와인 장수상을 하나 발견했고, 올해 그 주변 20×20m 발굴 조사에서 조선 전기 취두를 아래 위 완전한 형태로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임진왜란 거치며 다 깨졌는데… 온전한 취두 발굴 처음

왼쪽이 이번에 태안 갯벌에서 발굴된 조선 전기 취두, 오른쪽은 2008년 숭례문 화재 당시 수습한 조선 전기 취두다. 태안 갯벌 취두는 아래 위 조각이 각각 50~60㎏로, 사람이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기 용이하도록 반 잘라 두조각을 낸 모양이다. 숭례문 취두는 태안 갯벌 취두보다 훨씬 커, 2조각이 아니라 3조각으로 나뉘어있다. 사진 문화재청

왼쪽이 이번에 태안 갯벌에서 발굴된 조선 전기 취두, 오른쪽은 2008년 숭례문 화재 당시 수습한 조선 전기 취두다. 태안 갯벌 취두는 아래 위 조각이 각각 50~60㎏로, 사람이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기 용이하도록 반 잘라 두조각을 낸 모양이다. 숭례문 취두는 태안 갯벌 취두보다 훨씬 커, 2조각이 아니라 3조각으로 나뉘어있다. 사진 문화재청

화려하고 웅장했던 조선 전기 취두는 임진왜란 뒤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양식이 간략하게 바뀐다. 양기홍 연구사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왕실 건물이 많이 불에 탔고, 그 과정에서 기와지붕이 무너지면서 많이 깨졌던 탓에 온전히 남은 취두는 지금까지 2008년 숭례문에서 수습한 취두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숭례문 취두의 높이는 143㎝에 달한다.

이번에 취두가 온전한 형태로 발굴된 건 갯벌 덕이 크다. 양기홍 연구사는 “취두 위쪽으로 모래뻘이 50~60㎝ 정도 덮여있었다”며 “개흙(갯벌 흙) 속에 파묻히면 공기가 차단되기 때문에, 미생물이나 외부의 물리적 영향을 차단해 보존이 잘 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용산 가마터 출발, 남쪽으로 향하던 배

서울 용산구에 있는 '와서 터' 표지석. 김정연 기자

서울 용산구에 있는 '와서 터' 표지석. 김정연 기자

왕실 기와는 서울 용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와서’(조선시대 왕실의 기와나 벽돌을 만들어 바치던 관아)에서만 만들었기 때문에, 이번에 발견된 취두는 서울에서 배를 통해 남쪽으로 옮겨지던 중 배가 침몰해 수장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인숙 연구관은 "왕실 건물에만 쓰는 '취두'는 물론이고 특히 잡상 만드는 장인은 서울 와서에만 있었다"며 "삼남지방 왕실 관련 건물에 쓰기 위해 옮겨지던 배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조선왕조실록에 “태안 마도 인근 안흥량 바닷길이 험해, 운하를 뚫어달라는 건의가 왕실에 꾸준히 들어갔다”는 기록이 태종 때부터 있을 정도로 태안 인근에서는 배의 침몰이 잦았다고 한다.

국립태안해양유물전시관은 오는 31일부터 5일간 특별 전시를 통해 이번 발굴 기와 4점을 공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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