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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대왕’이 남긴 것…폐쇄공간에선 불의가 판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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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정치의 시작과 끝

무인도에 불시착한 아이들을 다룬 영화 ‘파리 대왕’(1992). 현실 정치의 생리를 보여주는 우화처럼 다가온다. [화면 캡처]

무인도에 불시착한 아이들을 다룬 영화 ‘파리 대왕’(1992). 현실 정치의 생리를 보여주는 우화처럼 다가온다. [화면 캡처]

정치의 시작과 끝에 관한 우화로서는 윌리엄 골딩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파리 대왕’만한 것이 드물다. 영화는 바다 한가운데서 일어난 비행기 사고로부터 시작한다. 이 느닷없는 사고로 인해 비행기에 탔던 소년들은 무인도에 불시착한다. 자신들을 보호하고 인도하던 어른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들은 이제 무인도에서 자신들의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

정치는 공존을 위한 질서의 모색 #인간의 선의에만 의존하지 않아 #갈등 해결할 제도적 장치가 필수 #리더십과 권력감시 균형 이뤄야

왜 하필 무인도인가. 무인도는 내륙에서 제공되던 각종 문명이 사라진 곳이다. 사회적 습속에 가려져 있던 인간의 민낯이 드러날 수 있는 공간이다. 인간 본성이 가진 각종 경향이 가감 없이 드러날 수 있는 이른바 ‘자연 상태’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소년들은 이 자연 상태를 벗어나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질서를 만들어야만 한다.

무인도에 불시착한 소년들의 선택

그나마 혼자 무인도에 불시착하지 않은 것은 축복인가. 로빈슨 크루소는 숙련된 성인 선원이었기에 혼자 힘으로 생존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이 소년들은 혼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공동생활을 통해서야 비로소 생존할 수 있다. 무인도라는 낯선 환경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반드시 협조적이라는 법은 없다. 부족한 자원으로 인해 서로가 경쟁자로 판명된다면, 타인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지도 모른다. 더불어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이 소년들에게 ‘정치’가 필요하다.

섬에 불시착한 소년들이 행한 첫 번째 정치 행위는 “누가 말할 것인가”를 정하는 일이었다. 공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공적인 규칙이 필요하다는 것을 소년들은 즉각 알아차린다. 규칙을 대신 정해 줄 전통이나 어른은 무인도에 없다. 소년들 스스로 합의를 통해 규칙을 만들 수밖에 없다. 너나 할 것 없이 동시에 떠들어 대면 어떤 합의에도 도달할 수 없을 것이므로, 소라고둥을 잡는 이가 발언하기로 정해진다. 소년들 나름의 의회가 성립된 것이다. 이제 이 의회를 통해서 필요한 것들을 정해 나가야 한다.

의회를 통해서 소년들은 일단 리더를 정하고자 한다. 인간은 평등하니, 리더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소년들은 시시각각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방향을 제시하고 추진할 인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소년들은 곧 깨닫는다. 의지할 수 있는 어른 같은 건 없다. 그렇다면 누가 리더가 돼야 하나? 소년들은 직위, 나이, 물리적인 힘 등을 고려하여 랄프를 리더로 옹립한다.

리더를 정하기만 하면, 만사형통일까? 리더가 있다고 해서 곧 질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고분고분한 존재가 아니다. 사실, 인간이 천사라면 정치처럼 피곤한 일은 필요 없을 것이다. 천사가 아닌 존재들이 어떻게든 견딜 만한 공존의 질서를 모색하고 유지하는 일이 바로 정치다. 무인도에 표류한 소년들에게 닥친 시련은 경제적 시련이기 이전에 정치적 시련이다.

두 파벌의 대립과 잇따른 공포

아니나 다를까, 나이나 체격에서 랄프와 비슷한 잭이 반기를 들기 시작한다. 소년들은 랄프와 잭을 중심으로 해서 두 정당, 아니 두 파벌로 갈라진다. 살이 쪘다고 놀림 받는 소년 피기는 랄프를 돕는다. 피기는 매사를 토론을 통해 결정하고 싶어 한다. 피기와 랄프는 목전의 필요에 전전긍긍할 게 아니라, 장기적인 대책을 가지고 자원을 운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예컨대 해변가 높은 곳에 모닥불을 피워 외부에 구조 신호를 보내야 한다.

랄프의 호전적인 경쟁자 잭은 당장의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 능사라고 믿는다. 구조될 가능성은 희박하니, 이 섬에 정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토론 따위는 시시하다며, 무기를 만들어 멧돼지 사냥에 나선다. 잭의 패거리는 외부에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잡은 멧돼지를 구워 먹기 위해서 모닥불을 사용한다.

두 파벌이 그럭저럭 균형을 유지할 때는 큰 문제가 없었다. 결국 자원 배분 능력이 뛰어난 잭이 승기를 잡는다. 사냥에 능한 잭은 돼지고기라는 희귀 자원을 다른 소년들에게 배분할 수 있다. 잭의 파벌이 절대적 다수가 되자, 문제가 악화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얼굴에 돼지피를 바르고, 몰려다니며 랄프 패거리를 약탈한다. 급기야, 말이 많은 소년 피기를 살해한다.

돼지고기를 먹게 해주고, 반대자를 제거했다고 해서, 정치가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불안한 소년들은 언제 분열할지 모른다. 랄프가 언제 기력을 회복해서 반기를 들지 모른다. 잭은 집단의 결속을 위해서 ‘공포’를 이용한다. 숲속에 괴물이 살고 있다고 선전하고, 부적 삼아 돼지머리를 괴물이 사는 숲에 세워둔다.

돼지머리는 곧 썩기 시작한다. 그 썩은 냄새를 맡고 파리들이 몰려온다. 마치 불나방이 가로등 주변을 에워싸듯이, 파리떼가 돼지머리 주변에 들끓는다. 썩어가는 멧돼지의 머리와 들끓는 파리들이야말로 ‘파리 대왕’의 내용을 압축하는 강렬한 이미지다. 파리떼처럼 자극에 반응하는 군집 상태만으로는 정치 공동체를 만들 수 없다. 성숙한 정치 공동체를 형성할 능력이 없는 파리떼는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소수자를 찾아 나선다. 소수자를 악마화하고 공격하는 동안 그들은 자신들의 진짜 문제를 잊을 수 있다.

유일하게 남은 다른 목소리의 주인공, 랄프가 그 공격 대상이다. 파리떼는 숲에 불을 질러 랄프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필사적으로 도망친 랄프는 해변에서 지쳐 쓰러지고 만다. 더 갈 곳이 없는 그는 이제 죽어야 하나. 바로 그때 ‘파리 대왕’의 결말이 찾아온다. 랄프가 고개를 들자, 거기 총을 든 해병대원이 무심하게 서 있다. 구조대가 도착한 것이다. 때마침 랄프를 쫓던 소년들이 나타난다. 돼지피를 바르고 창을 든 파리떼, 아니 소년떼를 보더니, 해병대원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한마디를 던진다. “너네 뭐 하고 있는 거냐.” 마치 인류 멸망의 순간에 지구에 도착한 신이 “인류, 너네 뭐 하고 있는 거냐”라고 묻듯이.

이것이 무인도 정치의 끝이다. 이 결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은 결국 바람직한 정치 질서를 창출하고 유지할 능력이 없다는 뜻인가. 결국 동료 인간을 해치고 만다는 뜻인가. 구원은 외부에서밖에 올 수 없다는 말인가. 대안은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을 기다리는 메시아적 정치뿐인가. 구조하러 온 외부인이 메시아라는 보장은 없다. 내부의 개판은 외부 개입을 정당화하는 법. 제국주의자들은 원주민의 자치(自治) 불가능성을 내세워 식민지를 개척하곤 했다.

외부와 소통해야 공동체도 건강

어떻게 하면 이 어두운 결말을 피할 수 있을까? 일단 섬처럼 고립된 공간에 갇혀서는 안 된다. 폐쇄된 정치 공간에서는 각종 불의와 부패가 판치기 쉽다. 외부로의 연결과 소통을 유지하는 것이 정치 공동체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핵심적이다. 그리고 인간의 선의에만 너무 의존하는 것도 현명하지 않다. 현실의 인간은 언제 어떻게 폭력적인 존재로 타락할지 모른다. 그 타락을 막을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소년들의 의회가 무너졌을 때, 갈등은 폭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정책에 대해 기꺼이 말로 설명하기를 기피했을 때 사태는 악화하였다. 갈등을 비폭력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파리 대왕’의 주인공들이 모두 아이들이라는 점도 시사적이다. 제대로 된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유아적으로 행동하기를 그치고 정치적 덕성을 함양해야 한다.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말한 것처럼, 미성숙한 인간들로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민의 성숙과 덕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어느덧 다수의 지배라는 민주주의 원칙을 버리고, 현자의 인자한 독재에 기대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권력의 전횡을 제어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이 어느 한순간 일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제도, 덕성, 리더쉽, 권력, 권력의 감시, 소통 등 제반 요소가 균형을 이룰 때 가까스로 바람직한 정치가 이루어진다. 그 균형도 시간이 흐르면 다시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심신의 건강에도 일상의 관리가 핵심이듯이, 정치 공동체의 건강도 일상적 관리가 핵심이다. 어느 정점에 도달했다고 해서 방심해도 좋은 것이 정치는 아니다. 건강이든 정치든, 늘 적절한 자극을 통해 활력을 유지하고, 활력의 적절한 배분을 통해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하염없는 과정이다. 정치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