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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퍼스펙티브

이재용 부회장은 백신 백기사 될 수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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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삼성의 모더나 위탁생산 백신 시나리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16일 영국 토트넘 홋스퍼의 손흥민 선수가 후반 10분 그림 같은 결승 골로 맨체스터 시티를 무너뜨렸다. 중계를 보던 한국 팬들은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이날 영국 런던의 홋스퍼 스타디움에는 마스크도 없이 6만2000명의 관중이 운집했다. 매일 2~3만명씩 발생하는 코로나 확진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영국은 집단격리도 없고, 가게와 자영업은 정상 영업 중이다. 코로나 백신이 가져온 일상이다.

“삼성이 획기적 공정기술 개발 땐 #모더나와 미 정부 움직일 수 있어 #위탁생산분 국내 배분 성공하면 #백신 부족 사태에 게임 체인저”

메이저리그 아메리칸 다승왕을 향해 질주 중인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류현진 경기도 마찬가지다. 미국 원정 경기에는 마스크도 안 쓴 무제한의 관중이 몰려들어 환호한다. 반면 한국 프로야구는 여전히 무관중이다. 지난달에는 선수들이 코로나에 감염돼 아예 리그를 일시 중단시켰다. 늦은 밤 류현진 경기를 지켜보며 문재인 정부의 백신 실패에 대한 원망이 커질 수밖에 없다.

#정부도 자영업·소상공인의 분노에 신경을 쓰는 눈치다. 대표적인 사례가 예비 전력이다. 지난달 27일 무더위 속에 전력 사용 피크 타임이 오후 2~3시에서 오후 4~5시로 바뀌었다. 여기에는 오후 2~3시에 통계에 안 잡히는 태양광 발전이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자 문 대통령은 “숨은 태양광 비중을 정확하게 다시 계산해 보라”고 지시했다. 탈원전 시비를 제압하겠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하지만 정부는 더 이상 전력 예비율 언급을 꺼리고 있다.

그 비밀은 따로 있다. 당초 정부가 전력 대란을 가장 걱정한 시기는 8월 9~13일. 전력 예비율이 5.1%까지 떨어질 것으로 우려했다. 정작 지난주 전력예비율은 무려 14.6∼22.4%였다. 날씨 변수와 함께 결정적인 비밀은 사회적 격리 4단계였다. 코로나로 식당·가게가 문을 닫으면서 자영업의 전력 소모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넉넉한 예비전력이나 태양광 발전의 숨은 활약을 뽐내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칫 백신 민심의 역린을 건드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백신 없는 대선 없다” 위기감 증폭

이철호의 퍼스펙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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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가석방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서울구치소에서 서울 서초동 삼성 사옥으로 직행했다. 삼성 관계자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광복절 연휴인 14일~16일에도 서초동 사옥으로 빠짐없이 출근을 강행했다. 수형 생활 중에 체중이 많이 빠져 자택에서 안정을 취할 것이란 예상과 정반대다. 삼성 주요 사장들도 연휴 내내 모두 출근해 비상대기하거나 긴급회의 관련 자료들을 챙겼다. 그만큼 반도체·코로나 백신이 다급한 현안이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가석방 다음 날 이례적으로 문 대통령의 메시지를 공개했다. “(이 부회장의) 반도체와 백신 분야에서 역할을 기대하는 국민이 많다.” 송영길 민주당 대표는 아예 “삼성바이오로직스가 곧 원액을 받아 완제품을 생산하는데, 이 백신을 국내 소비로 돌려야 한다”며 공개적으로 압박한다. ‘백신 없이 내년 대선 없다’는 위기감 속에 모더나 위탁생산분에 눈독을 들이는 것이다.

과연 정부 기대처럼 이 해법이 가능할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가능성은 반반이다.

정부는 보건복지부 차관과 청와대 사회정책비서관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지난 13일 미국 모더나 본사에 보냈다. 회의에는 지난 5월 문 대통령이 방미 때 만난 스테판 방셀 CEO를 제외한 모더나 핵심층이 대부분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정부 대표단은 모더나 측에 삼성바이오로직스 생산 물량의 국내 우선 공급을 요청했지만, 구체적 확답은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히려 정부는 혹을 더 붙였다. 모더나와 백신 공급 계약을 맺으면서 ‘ 분기별’로 얼마나 많은 물량을 들여올지 약정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과 유럽연합이 모더나와 월별 공급량까지 계약서에 넣은 것과 비교된다. 한마디로 ‘호갱님’ 취급을 받았다. 정부는 “백신 계약은 ‘비밀 준수를 유지해야 하는 협약’”이라 우겼지만 실제로는 ‘굴욕 계약’이었던 것이다.

모더나 백신의 배분권은 당연히 모더나 본사에 있고, 그 배후에는 미국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미친다. 모더나는 지난해 미국 정부로부터 백신 개발 지원금 9억 5500만 달러(약 1조 570억원)를 받았고, 미 정부는 mRNA 백신의 15억 2500만 달러(약 1조 6900억원)어치를 선구매까지 해 주었다. 이에 비해 화이자는 독일 바이오앤테크와 손잡고 독자적으로 mRNA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 상대적으로 미 정부 입김에서 자유롭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지난 5월 모더나와 수억 회분 mRNA 백신 위탁생산계약을 맺었다. 현재 모더나는 미국 이외 지역에는 스위스의 ‘론자(Lonza)’에 원액 제조를 맡기고, 이를 스페인의 제약사 ‘로비(Rovi)’가 병입(백신 원액을 최종 제품으로 만드는 과정)해 공급한다. 백신 배분 과정에서 모더나 본사와 미 정부의 글로벌 패권 전략이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전문가들은 모더나 백신을 국내에 우선 공급하려면 대체로 세 가지 방안이 있다고 꼽는다. 첫째는 유럽연합이나 인도와 같은 무력시위다. 지난 3월 유럽은 유럽산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의 호주 수출을 금지했다. 백신 민족주의에 따른 백신 전쟁이었다. 인도 정부도 인도 혈청연구소가 생산하는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의 해외 수출을 중단시킨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런 수퍼 갑질은 미국과 맞짱 뜰 수 있는 강대국들의 전유물이지 한국엔 너무 위험한 극약처방이다. 전문가들은 “우리가 위탁 생산한 백신 수출을 마음대로 끊으면 계약 해지는 물론, 향후 다른 백신의 수입까지 끊어질 수 있는 자해 행위”라고 말한다.

두 번째가 비밀리에 공급 순서를 앞으로 당기는 것이다. 그 선물로 삼성바이오로직스가 계약서에 나와 있는 위탁생산비를 확 깎아주는 방안이 거론된다. 하지만 모더나는 현재 가장 인기 있는 백신이다. 당초보다 공급 물량이 절반 이하로 줄어든 유럽·일본까지 눈을 시뻘겋게 뜨고 지켜보는 상황에서 공급 순서를 바꾸려면 모더나 본사와 미국 정부의 전폭적인 양해가 필요하다.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에 위탁생산비용 할인 같이 돈으로 해결하는 방식 역시 뒷맛이 개운치 않다. 전문가들은 “삼성바이오로직스가 공개 기업인 만큼 개인·외국인 주주들이 반발하면 나중에 법적으로 문제 될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화이자 백신 물꼬 튼 LDS 주사기

세 번째가 기술을 서로 주고받는 바터(barter)식 거래다. 가장 어렵지만 가장 고급스러운 해법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최소잔여형(LDS) 주사기다. 삼성은 미국 화이자가 백신 공급난을 덜기 위해 애타게 LDS 주사기를 찾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그래서 국내의 풍림파마텍을 발굴해 전폭적인 기술 지원으로 한 달 만에 최신 LDS 주사기를 대량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삼성은 이 주사기를 지렛대 삼아 화이자 백신 도입에 물꼬를 텄다.

삼성그룹은 최근 그룹 내부의 생산공정 전문가들을 대거 인천 송도 삼성바이오로직스 공장에 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휴대폰 분야에서 갈고 닦은 세계 최고 수준의 생산 공정 관리를 모더나 백신 위탁 생산에 적용해 보기 위해서다. 이들이 백신의 생산 효율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거나 생산 수율을 확 개선할 경우 모더나 본사와 미 정부를 향해 당당히 백신 물량의 국내 우선 공급을 요구할 수 있는 협상력이 생긴다. 이재용 부회장도 이번 주말쯤 생산공정 전문가들과 함께 직접 송도 삼성바이오로직스 현장을 찾을 계획이라고 한다.

무균충전 등 고난도 기술 필요

모더나 백신의 위탁생산은 단순한 공정이 아니다. 무균충전·품질 검사·라벨링·포장 등에 상당히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한다. 삼성은 다음 달 초부터 매주 1000만회 분 이상의 모더나 백신을 위탁생산할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생산 효율과 수율을 10% 정도만 끌어올릴 수 있다면 모더나의 기존 글로벌 공급 계획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채 매주 100만 회분의 물량을 국내에 우선 배분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여기에다 모더나 백신은 영하 20~30도의 냉장공급 체인이 필요한 만큼 국내 생산분을 국내에 우선 배분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그제 삼성바이오로직스 주가는 100만원을 돌파하면서 황제주로 올라섰다. 모더나 mRNA 백신 위탁 생산의 대형 호재에 증시가 반응한 것이다. 어제는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이 또 라디오 인터뷰에서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콕 짚으며 “(모더나 백신) 이 문제는 위탁 생산 물량의 국내 우선 공급으로 당연히 협의해 나가지 않겠느냐. 지켜봐 달라”고 압박했다. 모더나 백신 수급은 고차원의 방정식이다. 문제는 삼성그룹이 짧은 시간 내에 모더나 본사와 미 정부를 감동하게 할 수 있는 획기적인 생산 공정 기술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과연 ‘믿을맨’이란 기대대로 이 부회장이 백신 백기사가 될 수 있을까. 만약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백신 물량을 국내에 먼저 돌릴 수 있다면 9개월 넘게 끌어온 백신 사태는 결정적인 변곡점을 맞게 된다. 이 부회장과 삼성의 행보를 시장은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