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지영의 문화난장

어느 성형외과 의사의 한강 뷰 활용법

중앙일보

입력 2021.08.19 00:32

업데이트 2021.10.04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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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지영 기자 중앙일보 팀장
이지영 문화팀장

이지영 문화팀장

들어서는 순간 아∼,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유리 통창 바깥으로 한강이 코앞에 펼쳐져 있었다. 마포대교와 건너편 여의도, 63빌딩과 국회의사당이 한눈에 들어왔다. 분명 서점이랬는데 실은 도서관에 가까웠다. 매대의 책을 가져와 자유롭게 볼 수 있었고, 음료수를 마시면서 읽어도 됐다. 책을 사지 않고 하루종일 공짜로 머무를 수도 있다. 평일엔 오후 10시, 주말은 오후 9시 30분까지 문을 연다. 도대체 누가 이 금싸라기 같은 땅에서 이런 저부가가치 사업을 펼치고 있는 걸까.

서점 ‘채그로’ 이안나 대표
9층 병원 5개층이 책방
경관으로 책읽기 유인해
“독서는 사람 살리는 기술”

서울 마포동에서 이런 독특한 서점 ‘채그로’를 운영하는 사람은 옵티마성형외과 이안나 원장이다. 가슴성형, 표정치료 분야의 권위자로 유명한 의사다. 10여 년 동안 역삼동에서 병원을 운영하다 2012년 이곳에 9층 건물을 지어 이전했고, 2019년 8, 9층을 서점으로 꾸몄다. 지금은 2, 3, 6층까지 서점 공간으로 운영 중이다. 14일과 16일 두 차례 ‘채그로’를 찾아가 이 원장을 만났다.

이안나 옵티마성형외과 원장이 서점 ‘채그로’를 둘러보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안나 옵티마성형외과 원장이 서점 ‘채그로’를 둘러보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창밖 풍경이 환상적이다. 왜 서점을 냈나.
“이 땅을 나 혼자만을 위해 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포나루 근처인 이곳은 최소 2500년 전, 백제시대 이전부터 사람이 썼던 땅이다. 이 땅의 긴 역사로 볼 때 나는 길어야 50년, 아주 잠깐의 관리인일 뿐이다. 내가 ‘당번’일 때 뭐라도 좀 좋아지게 하는 것이 이 땅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래서 은퇴 후 하려고 마음먹었던 일을 앞당기기로 했다. 함께 책을 읽을 수 있는 곳, 사람들에게 책을 쥐여줄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일이었다. 도서관보다 덜 딱딱해 보이는 북카페 스타일 서점으로 컨셉트를 잡았다. 책 읽는 자리에 “뷰(view)로 유인해보겠다”는 전략이었다.

누가 봐도 수익이 날 일은 아니었다. 사재를 털어 시작했다. 시설비·운영비에 포기한 임대수익까지 생각하면 총투자금은 계산도 안 된다.

그는 책이 스승이 되고 친구가 돼줄 수 있다고 믿는다. 주변 가까운 친구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상황을 연이어 겪으며 이끌어낸 깨달음이다. “세상의 모든 걸 다 가진 것처럼 보였던 친구들이었다. 너무 좋은 인품, 그 좋은 머리와 지혜…. 도대체 뭐가 문제였던 건가. 그걸 가르쳐줄 인생의 스승을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 헤맸다.”

서울 마포대교 북단에 자리잡은 ‘채그로’의 한강 뷰. 노을 질 때 풍경이 특히 장관이다.

서울 마포대교 북단에 자리잡은 ‘채그로’의 한강 뷰. 노을 질 때 풍경이 특히 장관이다.

그는 책에서 그 답을 찾았다. 어느 특정 책에 답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책을 읽는 행위 자체에서 위태로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었다. 그는 “독서는 라이프세이빙 스킬”이라면서 수영에 비유했다.

책 읽기의 어떤 효용을 말하는 건가.
“인생의 위기 순간, 사람들은 친구와 전문가를 찾아다니며 돈과 인맥과 정보에 의지한다. 그런 방법들이 해결책이 돼주지 못할 때 세상에 혼자 버려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절망에 빠져버린다. 그때 자신이 ‘독서가능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너지지 않는다. 어느 친구가 매일 밤새워 이야기를 나눠줄 것이며, 세상 모든 분야의 지식을 알고 있는 전문가가 어디 있겠는가. 책은 이 모든 게 가능하다. 문제는 책을 못 읽는 ‘독서불능자’가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그는 한 번의 성공 경험이 중요하다고 했다. 마치 두발자전거 타기처럼 “아, 나 할 수 있네”를 깨닫는 순간을 몸이 기억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체험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1시간 40분 만에 책 한 권을 다 읽었던 날을 잊을 수 없다. 마음에 엄청난 안정감이 생겼다. 내가 말을 걸면 밤새도록 이야기해줄 지원군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 안정감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주고 싶다. 책을 통해 두 다리의 힘이 단단해진 사람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도 튼튼해지지 않겠나.”

‘채그로’는 ‘한강 뷰 명소’로 입소문이 많이 났다. 풍경에 끌려 찾아온 사람들을 ‘독서가능자’로 만드는 것이 그가 스스로 얹어준 과제다. “1년에 100권, 10년에 1000권, 30년에 3000권을 읽는 뿌리가 단단한 기둥들이 가득한 세상을 꿈꾼다”면서 ‘토요아침 독서모임’ ‘주니어 독서스쿨’ 등의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지난 14일 오전 7시. 광복절 연휴 첫날인데도 독서모임은 어김없이 열렸다. 이 날의 책은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참가비 1만원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자리였다.

“한계를 넘어 경지에 이를 일을 찾아야 하는데….” “안된다고 생각하면 확실히 안돼요.” “근데 목표를 달성해도 고달프지 않나요?”

각각 자신의 삶을 대입해 펼쳐놓는 참석자들의 이야기가 그림 같은 한강을 배경으로 역동적으로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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