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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진입 장벽 낮아져 ‘생계형 간첩’ 활개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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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장석광 전 국가정보대학원 교수 국가정보연구회 사무총장

장석광 전 국가정보대학원 교수 국가정보연구회 사무총장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원수님과 함께.’ ‘원수님의 충직한 전사로 살자.’ 국가정보원이 적발한 ‘자주통일 충북동지회’ 간첩단 사건 피의자들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혈서로 쓴 충성 맹세문이다. 북한 정보가 엄격하게 통제되던 1980년대도 아니고 개명 천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이라 일반 국민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울 듯하다.

‘충북 간첩단’은 과거와 양태 달라 #처벌 약해져 큰 두려움 없이 활동

과거 간첩단 사례를 보자. 북한 권력 서열 22위 최고위급 대남공작원 이선실(1917~2000)이 10년간 서울에서 암약하다 1992년에 적발됐다. 정당 대표까지 포섭하고 세 개의 간첩망에 400여 명이 가담해 조직을 결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세상을 놀라게 한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이다.

98년 12월 17일 남해안을 빠져나가던 북한 잠수정이 격침됐다. 서울 법대 출신으로 『강철서신』의 저자이자 80년대 주사파의 원조로 유명한 김영환이 지하당을 창당하고 암약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99년 터진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사건이다. 간첩단 사건이라면 대개 이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충북동지회 사건은 기존의 간첩단과는 달라서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듯하다.

92년 중부지역당 사건, 99년 민혁당 사건, 2006년 일심회 사건, 2011년 왕재산 사건, 그리고 이번 충북동지회 간첩단 사건 모두 핵심 관련자들이 80~90년대 학번 주사파들이란 공통점이 있다. 모두 북한 문화교류국을 상부선으로 연결된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이번 충북동지회 사건은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첫째, 같은 주사파이고 상부선이 동일하더라도 2000년을 전후해 주사파의 위상, 간첩 활동의 내용과 양태가 다르다. 2000년 이전 주사파는 대학 운동권의 주도 세력이었지만, 90년대 중반 북한에서 수백만이 굶어 죽은 ‘고난의 행군’ 대참사를 경험한 이후 핵심 분자들이 대거 주사파를 이탈했다. 북한은 이들 주사파와 연계해 남로당과 같은 대규모 지하당을 창당하기 위해 정예 대남공작원을 남파했다.

2000년 이후 주사파는 대부분 주변부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이다. 지적 수준이 떨어져 상황 판단을 제대로 못 하는 부류도 있다. 겉멋만 잔뜩 들어있어 제대로 된 공작 활동을 수행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둘째, 2000년 이후 간첩 활동은 그 전보다 진입 장벽이 많이 낮아졌다. 간첩 활동이 수월해졌다는 의미다. 그전에는 간첩으로 잡힐 경우 10여 년의 장기 투옥과 고문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2000년 이후 진보정권의 등장과 남북화해 분위기에 편승해 간첩죄라도 대개 3~4년만 복역하면 출소가 가능해졌다. 생활고를 겪는 중·하부 주사파는 북한과의 접촉에 유혹을 느낀다. 무지한 용감성은 북한 공작기관의 실적 유지 필요와도 맞물린다.

셋째, 2000년 이후 친북·통일 운동은 민주화운동의 일환이라는 인식이 정치권에 광범위하게 형성됐다. 북한을 추종하는 행위는 ‘깨어있는 의식’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을 훈장처럼 여기는 세력도 있다. 이런 사회 분위기의 변화는 간첩을 양산했고, 심지어 간첩 활동을 민주화운동으로 간주하는 그릇된 믿음을 갖게 했다.

일각에서 제기한 간첩 조작 의혹에 대해 박지원 국정원장은 “간첩 조작은 과거 사례”라고 일축했다. 빼도 박도 못할 증거들이 차고 넘친다는 확신일 것이다. 국정원은 이번 충북동지회 간첩단 사건을 국보법 수사의 전환점이 되도록 해야 한다. 국보법 위반자 몇 명을 검거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국정원은 3년 뒤 대공 수사권의 경찰청 이관에 위축되지 말고 자신감을 갖고 수사에 임해야 한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통일운동은 간첩 활동 및 친북 활동과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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