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만 철수하고, 평화협정은 휴지됐다…한반도에 남긴 시사점

중앙일보

입력 2021.08.1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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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난 15일(현지시간)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아프간) 정권을 탈환하면서, 지난해 2월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탈레반과 맺은 평화협정은 사실상 사문화됐다. 미국이 평화의 제도화를 위해 체결한 해당 협정에서 약속한 '미군 철수' 조항이 아프간을 탈레반에게 통째로 내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아프간 내 미군 철수만 명시..부메랑 된 평화협정
탈레반에 반격 여지 줘..아프간 정권 몰락
"한반도 평화협정, 北 비핵화 완료 후 이뤄져야"

2018년 판문점 선언 이후 문재인 정부도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목표를 추진해왔다. 이번 아프간 사태를 통해 실질적 비핵화와 맞물리지 않은 설익은 평화 협정은 오히려 평화를 위협하는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난 셈이다.

탈레반 무장세력이 지난 15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카불 대통령궁을 장악한 모습. AP. 연합뉴스.

탈레반 무장세력이 지난 15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카불 대통령궁을 장악한 모습. AP. 연합뉴스.

① 美-탈레반 평화협정 핵심은?

트럼프 행정부는 탈레반을 주권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하면서도, 아프간 정부를 배제하고 탈레반과 1년 넘게 직접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지난해 2월 카타르 도하에서 평화협정이 마련됐다.
협정의 요지는 ▶미군이 아프간에서 14개월 안에 철수 ▶탈레반은 알카에다 등 테러집단과 교류 단절 ▶아프간 정부를 포함한 아프간 내 정치세력 간 협상 개시 및 이에 따른 미국의 대탈레반 제재 재검토 ▶탈레반과 아프간 사이의 포로 교환 등이다. 특히 미군 철수의 경우 구체적인 시기와 감축 규모도 협정에 상세히 명시했다.
당시 협정에선 올해 5월까지 아프간 내 미군을 완전히 빼기로 했지만, 올 1월 취임한 조 바이든 대통령은 철군 완료일을 9·11 테러 20주기인 오는 9월 11일로 미뤘다.

2020년 2월 미국의 잘메이 칼리자드 협상 대표와 탈레반의 압둘 가니 바라다르 협상 대표가 카타르 도하에서 평화협정에 서명한 뒤 악수하는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2020년 2월 미국의 잘메이 칼리자드 협상 대표와 탈레반의 압둘 가니 바라다르 협상 대표가 카타르 도하에서 평화협정에 서명한 뒤 악수하는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② 왜 실패했나?

"미-탈레반 평화 협정은 모호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미군 철수 뒤 탈레반은 카불의 분열된 정부를 대담하게 무너뜨릴 것이다"
지난해 2월 협정 체결 후 미 뉴욕타임스(NYT)가 내놓은 예측이다. 이는 1년 6개월 만에 현실화했다.

이기범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미 지난해 6월 아산정책연구원 보고서에서 해당 협정에 대해 "미국과 동맹국의 철군 시한은 정해져 있었지만, 탈레반에게는 이에 상응하는 어떤 군사적 의무도 부과돼 있지 않았다"고 불균형성을 지적했다. 또 "협정에 '대내 협상', '민족 자결권' 등을 강조한 대목이 오히려 아프간 내부 투쟁에 따라 정치적 질서가 결정될 여지를 남겼으며, 결과적으로 탈레반 정권의 부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17일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미군 철수를 전제로 대내 협상, 민족 자결권을 강조한 내용이 결국 아프간의 향후 정치질서 형성에 있어 미국에 불리한 시그널을 보낸 셈"이라며 "당시 협정의 텍스트만 읽어봐도 탈레반의 부활을 예측할 수 있었을 정도"라고 말했다.

2020년 2월 체결된 미국과 탈레반 간 평화협정 원문 캡쳐. 미 국무부 홈페이지.

2020년 2월 체결된 미국과 탈레반 간 평화협정 원문 캡쳐. 미 국무부 홈페이지.

③ 文 정부의 평화협정 구상은?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평화의 제도화"를 강조했다. "남북이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한다"는 2018년 판문점 선언 3조 3항과 맥을 같이 하는 발언이다. 

실제로 정부는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1994년 이스라엘-요르단 간 평화협정 등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체결된 평화협정 전례를 참고해 자체적으로 협정 문안을 준비해왔다. 통상 평화협정에서 쟁점은 당사국 범위, 분쟁 지역 국경 설정, 기존에 관련국에 주둔하던 군대의 지위 변경 등인데, 이는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을 가정했을 때도 비슷하게 부각될 수 있는 사안이다.

이와 관련, 2018년 12월에는 국무총리실 산하 통일연구원이 9개 조항으로 구성된 평화협정 시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 연구원은 "북한 비핵화가 50% 정도 진척됐을 때 평화협정을 맺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는 2020년까지 북한 비핵화가 절반 정도 이뤄진다고 가정하고, 같은 해에 주한미군 단계적 감축 관련 협의에 착수한다고 명시했다.
또 유엔 안보리 결의를 거쳐 유엔사를 해체하는 데 동의한다는 내용도 시안에 포함됐다. 국책연구기관의 보고서가 꼭 정부 입장을 반영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를 두고 북한이 비핵화를 끝내기도 전에 평화협정부터 맺자는 것이냐는 비판이 나왔다.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판문점 선언문'을 교환한 뒤 손을 들어 보이는 모습. 연합뉴스.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판문점 선언문'을 교환한 뒤 손을 들어 보이는 모습. 연합뉴스.

④ 아프간 사태의 교훈

전문가들은 실패한 미-탈레반 평화협정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선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시 주한미군 철수 관련 내용은 신중히 다뤄야 한다고 지적한다. 협정에 주한미군 관련 내용을 포함하더라도 비핵화 완료에 대한 상응 조치라는 전제 하에 주한미군 철수 및 유엔사 기능 조정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아프간 정부가 배제된 채 체결된 미-탈레반 평화협정이 결국 아프간 정부를 무너트렸다는 점도 주목한다. 한국은 정전협정의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평화협정에선 핵심 당사자가 돼야 한다는 뜻이다.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종전선언은 비핵화 진전 과정에서 가능하더라도, 평화협정만큼은 반드시 비핵화가 완료된 뒤 체결해야 한다"며 "협정 체결 시 한국이 반드시 당사국으로 참여해 우리의 이익이 배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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