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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주의 위기 아프간…난민·빈곤·마약 지옥문 열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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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채인택
채인택 기자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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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국제전문기자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아프가니스탄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인 탈레반이 지난 5월부터 전국의 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하더니 급기야 8월 15일 수도 카불에 입성했다. 미군이 지난 4월 철군을 발표한 지 넉 달 만이다. 아프간의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국외로 도피했다. 미군은 떠나고 다시 오지 않는다.

탈레반 돌아왔지만 난제 산적해 #난민 260만, 국내 피란민 40만 #인구 절반이 하루 2달러로 살아 #국제 인도주의기관과 협력 필수

이슬람법(샤리아)과 중세 사회 규범을 추구하는 탈레반이 이 나라의 새로운 지배 권력이 됐다. 여성 인권을 제약하는 탈레반이 아프간 전역을 장악하자 서구 세계는 우려의 목소리를 낸다. 아프간은 탈레반의 등장으로 사회 분위기가 ‘세속적’에서 ‘교조적’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지만 이미 이슬람법에 의한 통치를 추구하는 ‘이슬람 공화국’이었다.

아프간의 진짜 위기는 지배층의 종교적 경향을 넘어 당장 먹고 사는 문제에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미 인도주의 위기와 난민 문제, 그리고 마약 확산의 지옥문이 열릴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미국과 서방 입장에선 철군과 카불 함락은 아무런 가망 없이 20년을 끌어온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끝을 의미한다. 더는 미국의 자원과 인력이 이 나라를 지탱할 일이 없어졌다. 철군을 결정한 미국과 나토 국가들이 아프간의 여성 인권이나 남은 사람들을 걱정하는 것은 위선이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아프가니스탄에선 지난 4월의 미군 철수 발표와 5월의 탈레반 공세 이후 약 40만 명의 국내 피란민이 추가 발생했다. [AP=연합뉴스]

아프가니스탄에선 지난 4월의 미군 철수 발표와 5월의 탈레반 공세 이후 약 40만 명의 국내 피란민이 추가 발생했다. [AP=연합뉴스]

아프간 국민 입장에선 1973년 친소 쿠데타로 시작된 내분·내전과 외세의 침략·간섭의 마무리되는 순간이다. 아프간의 역사는 79~89년 소련 침공, 89~96년 내전, 96~2001년 탈레반 1차 통치, 2001~2021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겪으며 피로 얼룩졌다. 그들은 이제 싫든 좋든 다시 탈레반의 통치 아래 놓였다.

중국과 러시아 입장에선 경쟁자인 미국이 20년간 볼모로 잡혀있던 아프간이라는 덫에서 탈출하는 사건이다. ‘남의 불행을 보며 기뻐한다’는 의미의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가 끝난 셈이다. 족쇄에서 풀린 패권 국가 미국의 다음 행보에 촉각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이런 국제정치적인 계산이나 전망과는 별개로 정작 아프간 국민이 맞닥뜨린 상황은 새로운 인도주의 위기다. 이미 아프간은 난민과 국내 이주민에서 세계에서 가장 우려되는 나라 중 하나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해외를 떠도는 아프간 난민은 260만 명(전 세계 11%)에 이른다. 10년 내전을 겪고 있는 시리아(670만명)와 국가붕괴 위기에 몰린 베네수엘라(400만명) 다음이다.

아프간의 동쪽 국경 너머에 있는 이웃 파키스탄이 아프간 난민 140만 명을 수용하고 있다. 시리아 난민이 몰리는 터키(370만명)와 베네수엘라 난민 등이 넘치는 콜롬비아(170만명) 다음이다. 인구 2억2500만 명의 파키스탄은 1인당 GDP가 1260달러로 사정이 넉넉하지 않다.

더욱 시급한 과제는 확산하는 국내 피란민(또는 실향민)이다. 아프간에선 내부 불안과 갈등, 탈레반과 정부군의 분쟁 등으로 다수의 국내 피란민이 발생해왔다. UNHCR에 따르면 지난해 연말까지 290만 명이 살던 곳을 떠나 정부군이 장악한 대도시로 피란했다. 최근 지방 도시들이 탈레반에 넘어가면서 수도 카불에 피란민이 몰렸다. 4월의 미군 철수 발표와 5월의 탈레반 공세 강화 이후 40만 명의 국내 피란민이 추가로 발생했다. AP통신 등 외신들에 따르면 카불은 거리 곳곳에 피란민 텐트가 들어서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다.

국내 피란민은 자칫 국경을 맞댄 파키스탄·이란·타지키스탄·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을 거쳐 유럽 등으로 향할 가능성이 크다. 국제사회가 시리아에 이은 새로운 난민 유입의 충격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20년 만에 권력을 되찾은 탈레반 세력에게 인도주의 문제와 국내 피란민의 재정착, 해외 난민의 귀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을지 의문이다. 가장 큰 도전은 경제이다. 아프간은 국제통화기금(IMF) 명목 금액 기준 2021년 전망치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592달러 수준이다. 세계 204위로 최빈국으로 분류된다. 인구 3980만 명에 GDP가 199억 달러로 119위다. 하루 1.9달러 이하로 생활하는 빈곤층이 인구의 54.5%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아프간의 국내 피란민이 기댈 곳이라곤 국제인도주의 기구뿐이다. 다행히 이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계속 활동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의 엘루아 피용 아프가니스탄 사무소장은 17일 트윗에서 이렇게 의지를 다졌다. “현재 카불에는 전투가 없다. 하지만 칸다하르·헤라트·라슈카르가흐 등 여러 도시에서 몇 주에 걸쳐 전투가 벌어진 결과 인도주의적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다. 수천 명이 부상했으며, 주택과 병원, 인프라가 파괴되거나 손상을 입었다. ICRC는 현재 이런 수요에 부응하는 게 임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인력과 활동을 줄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나라에서 30년간 활동해왔으며 지금 멈추지 않을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탈레반도 전투적 이슬람주의의 대외 수출보다 국내 이슬람화와 권력 안정화에 주력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경제와 인도주의적 문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자칫 과거처럼 가난한 농민들이 양귀비 재배로 빠질 수 있다. 아프간은 한때 전 세계 헤로인의 최대 90%를 공급했다. 난민과 마약, 이 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국제사회는 탈레반과 대화하고 협력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