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재택’의 그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김창규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김창규 경제에디터

김창규 경제에디터

“근무시간에 웬 게임을 하고 계세요?”

코로나19 여파 비대면 확산중 #메타버스 시대 뉴노멀됐지만 #협업·창의성엔 대면도 중요해

정보기술(IT) 관련 대기업에 근무하는 A씨는 협력사에서 일하던 중 협력사 직원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사실 그는 회사가 구축한 ‘메타버스’ 사무실 공간에서 회의하고 있었다. 얼굴 대신 캐릭터 등을 활용한 가상 사무실의 모습을 협력사 직원이 게임으로 착각한 것이다. 메타버스는 가상·추상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세계·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가 합쳐진 말이다. 요즘엔 가상과 현실이 융합해 상호작용하는 3차원의 세상을 뜻한다.

A씨 회사는 사무공간을 실제에 근접하게 가상 공간에 옮겨놓았다. 개인 자리에서 업무를 보는 건 물론이고 마우스를 클릭해 복도로 이동하면 (실제와 같이) 가까이 있는 동료의 대화 등이 들린다. 또 마우스를 이동해 회의실 앞에 있을 땐 소리가 나지 않다가 회의실 문을 열면 회의에 참여할 수도 있다.

코로나19 장기화는 삶의 행태를 확 바꾸고 있다. 단순히 집에서 근무하거나 공부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가 섞이면서 근무, 학습, 놀이, 모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변화가 일고 있다. 많은 전문가는 이런 변화가 코로나19로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 서서히 진행되던 움직임이 최근 가속화됐다고 진단한다.

코로나19로 비대면이 일상화된 데다 취업 좌절, 경제적 어려움, 소통 불만 등 현실의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많은 젊은이가 메타버스의 세계로 빠져든다. 젊은 세대는 이젠 이런 흐름에 익숙해지고 있다.

서소문포럼 8/18

서소문포럼 8/18

한 대학교수는 최근 이런 경험을 했다고 한다. 올 초 화면으로 얼굴을 보며 온라인 수업을 하다가 학생에게 질문했더니 (실제 강의실에서 했던 것처럼) 순간 ‘정적’이 흘렀다고 한다. 학생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 전 방식을 바꿨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카메라 끄기’를 하고 음성 이외에도 익명, 텍스트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의견을 낼 것을 주문했다. 그랬더니 많은 학생이 질문에 응답했고 수업에 활력이 넘쳤다고 한다.

많은 기업이 앞다퉈 이 시장에 뛰어들고 있는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치 않다. 올 3월 상장한 미국의 대표적인 메타버스 기업 로블록스는 시가총액이 53조원에 달한다. 로블록스는 레고 같은 블록 모양의 캐릭터를 이용해 가상세계 안에서 게임을 만들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만든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게임플랫폼이다. 수많은 명품기업과 대기업이 이런 가상세계에 입점하려고 줄을 선다. 지난 5월엔 로블록스에서 구찌의 디지털 가방이 4115달러(약 465만원, 당시 환율 기준)에 팔릴 정도다. 현실에선 들고 다닐 수도, 볼 수도 없는 가방인데도 많은 사람이 열광한다.

또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7월 “5년 내에 메타버스 기업으로 변신하겠다”고 깜짝 선언하는가 하면 디즈니랜드도 메타버스를 구축하기로 했다. 메타버스가 새로운 기준인 뉴노멀(New Normal)이 되고 있다.

근무 방식과 임금 체계를 고민 중인 기업엔 ‘새로운 계산법’이 등장했다. 구글·마이크로소프트·페이스북·트위터 등 빅테크 기업은 재택근무자의 거주지 물가에 기반을 둔 임금 체계 개편을 추진하고 있다. 뉴욕처럼 물가가 높은 곳에 사는 재택근무자는 임금을 그대로, 물가가 낮은 지역에 사는 재택근무자는 임금을 낮추는 식이다. 이젠 얼마 가지 않아 사무실 근무 직원과 재택근무 직원으로 나눠 뽑는 시대가 올 전망이다.

시장은 비대면·가상세계로 가고 있다. 하지만 기업 전문가는 이런 과정에서 해결해야 할 난제가 있다고 한다. 바로 창의성이다. 비대면 소통을 통해서도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다. 다만 한 대기업 연구·개발(R&D) 담당자는 “개인의 창작이 아닌 여러 사람이 협업해서 개발 작업을 하는 경우엔 비대면은 비효율적이고 소통에 어려움이 많다”고 말했다.

스티브 잡스는 영화사 픽사의 사옥을 설계할 때 다양한 직군의 사람이 우연히 맞닥뜨리도록 가운데에 회의실·카페·화장실 등을 배치했다. 특정 집단끼리의 정해진 회의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우연한 만남을 통해 자주 마주칠수록 창의적이 된다는 판단에서다.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작품 덕에 픽사는 ‘믿고 보는 영화사’라는 이미지를 갖게 됐다.

전정주 위워크코리아 대표는 “우연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건 화상회의로는 어렵다. 격의 없이 대화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건 대면 업무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비대면 시대에도 반짝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위해선 서로 눈을 마주치는 대화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