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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미적미적 간첩 수사, 잡을 의지가 있기는 한 건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북한 지령을 받아 간첩 활동을 한 혐의를 받는 충북 청주 지역 활동가 4명이 2017년 5월 충북도청 브리핑룸에서 문재인 대선 후보 지지선언을 했다. 이중 셋이 최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연합뉴스

북한 지령을 받아 간첩 활동을 한 혐의를 받는 충북 청주 지역 활동가 4명이 2017년 5월 충북도청 브리핑룸에서 문재인 대선 후보 지지선언을 했다. 이중 셋이 최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연합뉴스

북한의 지령을 받아 미국산 스텔스기 도입 반대 운동을 벌인 혐의가 드러난 ‘자주통일 충북동지회’는 북한에서 공작금을 받고 충성 서약도 했다. 문재인 대선후보 특보단에 이름을 올리고 버젓이 ‘윤석열 검찰총장 탄핵’ 촉구 광고비 모금 운동도 벌였다. 지난 5월엔 서울 미근동 경찰청사 앞에서 김일성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 읽기 운동을 벌였다. 경찰청은 2024년부터 국가정보원으로부터 대공수사권을 전부 넘겨받는다. 현 정부의 대공수사 기능 개편으로 사실상 무력해진 수사 체계를 비웃는 행태가 아닐 수 없다.

검사 1명 파견 요청에 “서울에도 여력 없다” #국정원 대공수사권 이관, 전면 재검토해야

이들의 대범한 간첩 활동도 충격적이지만 간첩 수사 과정에 갖가지 장애 요인이 추가되면서 수사가 어려워졌다는 점이 더 우려스럽다. 가장 큰 문제는 더불어민주당이 지난해 12월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통째로 경찰로 넘기는 국가정보원법 개정안을 졸속 처리했다는 것이다. 방첩 전문가나 국민 인식 조사는커녕 국정원과 경찰 양 기관의 간첩 수사 시뮬레이션을 통한 실증 분석 등 객관적 평가도 전혀 거치지 않았다. 간첩 수사는 수년에서 수십 년간 축적한 첩보 수집과 공작 역량이 바탕이 돼야 성과를 낼 수 있다. 충북동지회 사건에서 보듯 북한은 남북대화에 응하는 척하면서도 4년 내내 중국과 캄보디아 등지에서 대남 공작을 멈추지 않았다. 그간 해외 현장에 잠복하며 핵심 증거를 확보한 기관은 국정원이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상부에서는 간첩 수사를 하지 못하게 억누르고 현장에선 눈치 보며 수사를 꺼리는 분위기가 조성됐음은 ‘불편한 진실’에 속한다. 정부가 유화책 일변도의 대북 정책을 고집하며 북한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직간접적으로 내비친 탓이 크다. 정부는 북한의 대남 전략에 맞대응해 온 검찰 공안부 등 수사기관들부터 구조조정 대상에 올렸다. 야당과 시민단체들이 “국가보안법 철폐와 검찰 공안부 폐지는 북한의 숙원이었다”며 “북한이 공개 반발하며 ‘하명’하자 부랴부랴 대북 전단금지법을 만들고 한·미 연합훈련을 축소한 것과 맥락이 닿아있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일 만도 하다.

국정원이 2017~2018년 북한 공작조와 이들 간의 회합 증거를 확보하고도 즉각 수사로 전환하지 않은 것도 정부의 ‘북(北)바라기’와 연결된 것 같다. 이런 와중에 충북동지회 사건에 대한 보강 수사를 준비 중인 청주지검이 대검에 공안통 검사 파견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소식은 귀를 의심케 한다. 대형 간첩사건에 검사 1명을 파견해 줄 수 없는 이유가 “서울에도 여력이 없다”는 것이라니 말이나 되는 얘기인가. 남북 분단 상황에서 대공 수사의 성패 여부는 국가 안보와 직결된다. 이번에 북한의 대남 공작 전술의 전모를 분석한 뒤 이를 바탕으로 대공 수사기구 개편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