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look] 헤라트서 부르카 바꿔입고 외출, 미리암은 무사할까

중앙일보

입력 2021.08.18 00:02

업데이트 2021.08.18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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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난 8일 아프가니스탄 서부 헤라트의 난민시설에 머무르고 있는 여성과 어린이들. [EPA=연합뉴스]

지난 8일 아프가니스탄 서부 헤라트의 난민시설에 머무르고 있는 여성과 어린이들. [EPA=연합뉴스]

“어머! 어제 헤라트도 탈레반 손에 들어갔네.”

2002년 탈레반 퇴각 직후 긴급구호
당시 NGO 통역 맡았던 20살 미리암
“과거 여자가 있을 곳은 집안·무덤뿐
탈레반 돌아온다면 난 죽어 마땅해”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해줬는데…
그와 두 딸은 탈레반 치하 살게 돼

며칠 전, 국제뉴스를 보다가 깜짝 놀라 외쳤다.

“벌써 헤라트까지?”

40여 년 국제구호에 몸담았던 남편 안톤도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카불 함락도 시간문제군.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빠른 줄은 몰랐네.”

헤라트! 아프가니스탄 서부의 역사 찬란한 이 도시는 안톤과 나에게 매우 특별한 곳이다. 나는 1995년 세계여행 중에, 그는 1974년 아시아 여행 중에 머물렀던 도시이고, 난 그때 만난 난민촌 아이들 덕분에 긴급구호에 투신할 결심을 굳히게 됐다.

그리고 6년 후인 2002년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으로 첫 현장 파견된 곳도, 안톤을 처음 만난 곳도 바로 헤라트다(그때 그는 월드비전 중동 지역 총책임자로 아프가니스탄 긴급구호를 맡고 있었다). 우리가 만난 지 20년 되는 2022년, 헤라트에 다시 가볼 계획을 세워놓고 코로나19 팬데믹이 누그러들기만을 바라고 있었는데, 지금대로라면 시간 여행자가 아니라 긴급구호 요원으로 갈 확률이 훨씬 높다.

극심한 식량난, 먼지가 밀가루였으면

한비야씨가 1995년 헤라트 첫 방문 당시 부르카를 입고 현지 아이들과 함께한 모습. [사진 한비야]

한비야씨가 1995년 헤라트 첫 방문 당시 부르카를 입고 현지 아이들과 함께한 모습. [사진 한비야]

2002년 탈레반 퇴각 직후, 내가 속한 국제구호개발단체는 헤라트를 중심으로 긴급구호를 시작했다. 긴급구호란 식량 및 영양, 물, 보건위생 및 의료, 피난처 보호 등 살아남는 데 꼭 필요한 물품과 서비스를 지원하는 일이다. 우리 단체는 15만 명을 대상으로 식량, 난민 그리고 여아를 위한 학교 지원 사업을 펼쳤다. 그중 나는 식량 사업을 맡았는데 산속 마을에서 몇 날 며칠 극심한 영양실조로 사경을 헤매는 아이들을 보다 보니 흙길에 오토바이가 지나가며 내는 뽀얀 먼지만 보아도 “아, 저게 다 밀가루였으면” 하는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우리 단체의 통역 중 군계일학은 갓 20세 미리암이다. 1996년부터 2001년, 탈레반이 장악했던 6년간, 여자들은 학교 근처에도 못 갔는데 다행히 무역업자인 아버지가 자기와 여동생에게 몰래 영어를 가르쳐주었단다. 숨어서 배운 유창한 영어로 미국에 대해선 탈레반을 몰아내준 건 고맙지만 향후 모든 과정은 우리와 충분히 논의해야 한다고 거침없이 의견을 말하고, 국가 재건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겠다는 당찬 젊은이였다.

미리암은 아시아 여자 요원인 나를 잘 따랐고, 나도 무슨 얘기를 하든 크고 까만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듣고는 질문을 쏟아내는 이 친구가 맘에 들었다. 내 현지인 인터뷰 통역은 이 친구가 도맡았다. 탈레반 시절, 발목이 보였다고 길거리에서 종교경찰에게 가죽 채찍으로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았다는 20대 여자와 수염을 짧게 깎았다는 이유로 오른 손목이 잘린 30대 남자 이야기 등 이들이 당한 탈레반의 잔인한 행위에 마음이 찡해 눈물을 글썽이면 미리암도 굵은 눈물을 떨궜다. 그러면서도 후렴처럼 덧붙이는 말, “그러나 그때는 공개 처형을 면한 것만 해도 행운이었죠.”

어느 날, 시장 근처에 같이 가겠느냐니까 반색을 한다. 탈레반 시절에는 여자의 문밖출입이 엄격히 제한돼 남편이나 아들, 오빠나 남동생 없이 혼자서 시장도 병원도 못 갔단다. 여자가 있어야 할 곳은 집 안과 무덤뿐이었다는데 지금 누리는 여자끼리의 이 자유로운 나들이가 꿈만 같다고 했다.

그 말에 갑자기 내 장난기가 발동했다.

“미리암, 우리 옷을 바꿔 입고 나가볼까? 내가 자기 부르카(머리부터 발목까지 덮어쓰는 이슬람 여성 통옷)를 입고 자기는 내 스카프로 머리만 가리고 말이야. 이제 부르카를 안 입어도 된다잖아?”

호기심에 못 이겨 흔쾌히 내 제안에 응했던 미리암이 몇 시간 만에 사무실에 돌아와서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시는 부르카 안 벗을 거예요. 내내 벌거벗고 다니는 기분이었어요. 게다가 누가 날 알아볼까봐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탈레반도 없는데 뭐가 무서워?”

“만약에, 만에 하나 그들이 다시 오면 나는 죽어 마땅한 여자예요. 우리 엄마는 외국 NGO에서 일하는 내가 아슬아슬하대요. 탈레반에게는 역적질이거든요.”

그때 내가 자신 있게 말했다.

“미리암, 걱정하지 마.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지난 3월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태권도장에서 연습하고 있는 아프간 소녀들. [AP=연합뉴스]

지난 3월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태권도장에서 연습하고 있는 아프간 소녀들. [AP=연합뉴스]

절대 없어야 할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탈레반이 다시 헤라트를 장악했으니 말이다. 얼마 전까지 미리암은 e메일로 신변 변화의 주요 내용을 내게 빠짐없이 보고(!)했다. 그사이 그는 외국 NGO 몇 군데를 거치며 핵심 현지요원으로 성장했고 결혼해서 딸 둘을 낳고 헤라트에서 살고 있다. 미리암의 딸들은 15세와 12세, 둘 다 국제기구에서 나라와 세계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과 한국에 와서 태권도를 배우는 게 꿈이란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쩌랴. 이제 이 꿈에 부푼 이 딸들은 탈레반 통치 아래서 살아야 한다.

세계 무대는커녕 이들이 있을 곳이 다시 집 안과 무덤이 되는 게 아닐까 두렵다. 적어도 이 아이들은 친구들과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웃고 떠들 수 없을 것이다. 좋아하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다닐 수도,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할 수도, 야무진 포부를 가질 수도 없을 것이다. 아니, 꿈이 있다는 것,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세상이 돼버렸다. 지난 15일, 카불의 대통령궁을 수중에 넣은 탈레반 지도부는 전쟁이 끝났음을 선언하면서 말했다.

“우리는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개방적이며 포용적인 정부를 구성할 것이다. (…) 히잡을 쓴다면 여성은 계속 학교와 일자리에 접근할 수 있고 혼자 집 밖에 나가는 것도 허용할 것이다.”

국제구호개발단체에 대해서도 이렇게 견해를 밝혔다.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일하는 외국 NGO들에 어떠한 해도 가하길 원치 않으며, 현 인도적 위기에 도움을 주는 외국 단체들을 고맙게 여길 것이다.”

이런 사뭇 유연해진 듯한 탈레반의 태도와 발언에 대한 국제정치나 이슬람 전문가들의 해석과 대처 방안 제시와는 별개로,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국제구호단체나 전문가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국제단체가 아프가니스탄에 쏟아붓는 매년 수조원에 달하는 각종 형태의 해외 원조를 탈레반이 가볍게 볼 리는 없겠지만, 이들의 통치하에 진행될 내전 후의 강도 높은 인도적 지원은 예전보다 훨씬 유연하고 지혜롭고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게 이 분야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탈레반은 하루아침에 모든 외국 NGO 프로그램을 중단시키고 그 직원들을 즉각 추방하거나 현지 직원들을 감옥에 집어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서구 영향을 배제하고 초기 이슬람의 가치와 규율로 돌아가는 세상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국내외 구호개발단체들은 지난 20년 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나도 그렇다. 앞으로 국제구호개발단체는 이런 탈레반 아래서 일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고백하건대 내가 일했던 단체를 비롯해 대부분의 국제 NGO들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소위 ‘서양 중심의 제국적 인도적 지원·개발 협력’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의 이상과 가치가 더 높고, 당신들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더 많이, 더 깊이 알고 있으며, 우리가 자원과 인력과 시스템을 가지고 왔으니 우리 말을 따르라”다. 그래서인지 내가 보기에도 고압적이거나 현지인들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 국제직원이 많다. 또한 이른바 ‘서양식 가치’에 입각한 원칙과 규칙이 문화·종교·풍습이 전혀 다른 구호 현장에 적용하기 어려운 것도 허다하다.

다음 임무지가 다시 아프간 될 수도

이제 이 나라에서 도와야 할 사람들을 도우려면 국제구호개발의 대원칙에 벗어나지 않는 한 현지인과 현지 사정에 좀 더 겸손하고 유연해야 한다. 조금 말하고 많이 듣고 훨씬 많이 기다려야 한다. 일하는 지역이 전통적인 시골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슬람에 대한 자부심이 높고 어떤 상황에도 탈레반 지지 세력이 남아있는 곳이 이런 지역이니까. 식량 지원, 보건위생, 농기구 및 생계 지원 등 탈레반과 크게 문제 될 게 없는 기본 사업은 진행하되 여성 지위향상 교육, 성 평등, 인권 보호 관련 프로그램이나 지역민 민주 역량 강화 등은 상황을 지켜보면서 완급을 조절하는 게 현명하다.

어제(16일)도 어떤 국제구호단체가 “우리는 계속 아프간 여성들의 인권을 위해 싸우겠다”고 선언했는데 당분간 이런 식의 발언은 꾹 참아야 한다. 탈레반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우리 할 일을 계속하기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말이다.

올 11월에 남수단으로 파견근무 갈 계획이었지만, 지금 상황이라면 다음 근무지가 헤라트가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아프가니스탄에 긴급구호팀장으로는 다시 가고 싶지 않았건만….

한비야

2002년 3월 아프가니스탄 구호활동에 참가하며 오지여행 전문가에서 국제난민 운동가로 변신했다. 2009년까지 한국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으로 세계 곳곳의 재난 현장에서 일했다. 2019년 국제학 박사 학위를 받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프로젝트별로 해외 구호현장에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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