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고현곤 칼럼

기울어진 운동장의 젊은이들

중앙일보

입력 2021.08.17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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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일자리를 찾는 20대 청년이 있다. 코로나 사태로 취업 문이 좁아지자 대학 졸업을 유예했다. 어느덧 6학년 1학기. 돌이켜 보면 늘 힘들었다. 일반고 3년 내내 별 도움을 받지 못했다. 학생 절반은 졸고 있는 교실, 무슨 영문인지 질문을 받지 않는 선생님. ‘6·25 전쟁이 남침인지, 북침인지 명확지 않다’는 정체불명의 선생님도 있었다. 수시 학생부종합전형을 준비하려 해도 학교에 비교과 프로그램이 별로 없었다. 스펙이 쌓일 리 만무했다. 자기소개서에 쓸 말이 없어 이것저것 갖다 놓고 작문을 했다. 자소서 작성 때 담임선생님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나마 조금 손을 봐준 건 국어학원 선생님. 수시 논술도 준비해야 했는데, 학교에서 ‘논술의 논’자도 배울 수 없었다. 따로 논술학원에 다녀야 했다.

일반고에서 대입 때 도움 못 받고
대학에선 인턴 진입장벽 부딪혀
취업 땐 불투명 수시채용에 좌절
기업, 손해봐도 공채 유지했으면

결국 대입에서 떨어졌다. 다닥다닥 붙어 앉은 재수학원에서 1년의 사투 끝에 정시로 간신히 대학에 입학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일반고에선 지역균형 외의 수시 학종에 합격하는 게 쉽지 않다고 했다. 그건 고교 3년간 화려한 스펙을 쌓은 특목고 출신의 몫. 부모들이 기를 쓰고 특목고에 보내려는 이유가 다 있었다. 일반고를 특목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면 된다고 물정 모르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다. 일반고의 허술한 교육시스템을 겪어보니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문재인 정부는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자사고 폐지를 추진한 것. 얼핏 정의로운 듯 보이지만, 잘 나가는 곳을 찍어눌러 키를 맞추는 하향 평준화다. ‘다 같이 못살자’는 좌파식 평등주의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챙길 건 다 챙긴다. 자사고 폐지를 주도한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두 아들을 외국어고에 보냈다. 진보진영의 내로남불은 이제 놀라울 것도 없다. 일반고 다닌 사람만 바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최순실·조국 딸의 입시 비리 때는 피가 거꾸로 솟았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의문의 1패.

대학에서도 낭패는 계속됐다. 취업을 하려면 인턴 경험이 필요했다. 그런데 인턴을 언제 어디서 뽑는지 알기 어려웠다. 어렵사리 몇 군데 지원했으나 계속 떨어졌다. 인턴 시장에도 진입 장벽과 ‘부익부 빈익빈’이 존재했다. 괜찮은 인턴 경력이 한두 개 있어야 그걸 내세워 또 다른 인턴을 구할 수 있었다. 잘나가는 부모들끼리 품앗이 비슷하게 자녀 인턴을 챙겨준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여기엔 진보·보수가 따로 없다. 자식 사랑이 남다른 기득권층의 연대와 협력이 있을 뿐이다.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지적처럼 ‘능력주의가 낳은 불평등’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의문의 2패.

그러는 사이 기업 채용에 가슴 철렁한 변화가 생겼다. 수시채용이 2018~2019년 조금씩 늘더니 코로나 이후 대세로 자리 잡았다. 공개채용 비중은 2년 전 49.6%에서 올 상반기 30.1%로 감소했다(인크루트). 매년 공채로 8000명을 뽑던 현대자동차에 이어 SK·LG·롯데 등이 공채를 폐지했다. 공채가 있는 대기업은 삼성과 CJ 정도다. 기업은 필요 인력을 콕 짚어 뽑는 수시채용이 효율적이다. 채용 비용도 적게 든다.

하지만 취업준비생, 특히 흙수저 취준생 입장에선 공채가 여전히 매력적이다. 어느 기업이 언제 얼마나 뽑을지 예측할 수 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여기에 맞춰 도전해 볼 수 있다. 수시채용은 일정 파악부터 힘들다. 취업정보도 명문대에 집중된다. SKY대 취업 커뮤니티의 정보를 얻기 위해 친구 아이디를 빌리는 진풍경도 벌어진다. 수시채용은 경력직보다 신입이 불리하다. 인턴 때처럼 진입 장벽에 부딪힌다. 원하는 기업이 채용에 나설지도 불투명하다. “수시채용은 공채보다 불확실하고, 인원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용정보원 관계자). 문 대통령은 최근 “민간 기업의 일자리 창출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그런 허망한 발언은 더는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의문의 3패.

공무원시험이 힘들어도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든다. 취준생 86만 명, 그중 3분의 1인 28만 명이 공무원시험을 준비 중이다(통계청). 젊은이들이 안정적이고 편한 직업만 찾아 공무원시험에 몰리는 게 아니다. 그나마 투명하게 똑같은 조건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기 때문이다. 안경덕 고용노동부 장관은 얼마 전 “수시채용보다 공채를 활용해 달라”고 요청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기업 반응도 냉랭했다. 정부가 소득주도 성장을 한다며 규제를 틀어쥐고, 기업을 괴롭히며 일자리를 줄였다. 이제 와서 채용방식까지 간섭하는 게 염치없다. 그 책임은 추후 반드시 물어야 한다.

그런데 당장 급한 대로 잠시 숨을 돌리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모든 사람에게 열린 기회인 공채를 기업이 조금만 더 유지할 수는 없을까. 생색내기 이벤트나 허울 좋은 언론플레이보다 이런 게 진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아닐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의문의 패배를 당해 온 젊은이들을 위해. 기업이 좀 손해를 보더라도. 수요와 공급에 따른 시장원리에 맞지 않더라도. 글로벌 스탠더드(공채는 한국·일본만 있다)가 아니더라도. “일을 통해 사람은 더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는 교황 요한바오로 2세(재위 1978~2005년)의 말씀이 절실하게 와닿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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