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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서로 꼭 필요한 관계가 된 한국과 미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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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인요한 연세대 의대 교수·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인요한 연세대 의대 교수·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흥남철수 작전에서 옛 세브란스 의전(현 연세대 의대) 출신인 현봉학 박사는 민간인의 흥남철수를 가능하게 해서 ‘한국의 쉰들러’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통역관으로서 포니 대령과 함께 미 해병 10군단 알몬드 사령관을 설득해 미군과 국군만 부산으로 후송토록 한 작전을 변경시켜 10만여 명의 피난민이 자유 대한의 품에 안길 수 있게 한 역사적 사건의 인물이다.

흥남철수 포니 대령 손자며느리 #세브란스 병원서 난치병 치료 #반도체 협업처럼 한·미는 동반자

70년 넘게 지난 최근, 포니 대령의 손자의 부인이 세브란스 병원에서 난치병 치료를 받았다. 현봉학 박사 기념사업회 한승경 이사장(연세대 의과대학 총동창회장)은 이분들께 1천만 원의 치료비를 전달하였다. 이 자리에서 포니 대령의 손자는 “우리 할아버지가 흥남철수 작전에서 많은 피난민들을 배에 태울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나의 부인의 치료하기 어려운 병을 세브란스에서 완치에 이를 때까지 치료받을 수 있었다. 이제 우리가 도움을 받게 되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자리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감동했다.

8·15 광복절 무렵이 되면 나는 잊지 않고 돌아가신 나의 큰아버지를 생각한다. 그분은 팔라우 전투에 용맹스럽게 참전해 미국의 훈장을 받았다. 우리 큰아버지가 들려주시던 팔라우에서의 경험담이 있다. 미 해병대가 팔라우 섬을 점령하는데 생각보다 일본의 저항이 강했고, 미국 해병대 인력도 부족하였다. 이것은 역사의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는 사실이다.

큰아버지 윌리암 린튼은 아버지 형제들 중 가장 머리가 좋은 분이었다. 7개 언어를 사용했고 수학, 특히 물리학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었던 분이었다. 큰아버지는 일어에도 능통했고 한자도 잘 알고 있었기에 팔라우에서는 정보병으로 있었다. 팔라우에서 치열한 전투 중이었던 어느 날, 어디선가 한국말이 들렸다. 한 남자가 한국말로 마흔여덟 명의 한국인이 일본군에게 강제 징집되었고 그 한국 청년들이 굴속에서 굶어 죽어간다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큰아버지는 고민 없이 “그곳으로 가자”며 그 한국 사람을 따라갔다. 한국 사람들이 있다던 동굴은 지뢰밭을 건너야 하고 미국 진영에서 일본 진영으로 들어가야 하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지만, 큰아버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 한국인은 “내가 밟은 곳만 밟으면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고 큰아버지는 아주 조심스럽게 앞서가는 그 한국인의 발자국을 그대로 밟아가며 지뢰밭을 건너서 팔라우의 깊은 굴속에 도착했다.

정말 그곳에는 마흔여덟 명의 한국인이 있었다. 큰아버지를 본 한 청년이 “미국인들은 우리와 일본인을 구별도 못하고 결국 미군이 우리를 다 쏴 죽일 텐데 여기서 그냥 굶어 죽겠다”라고 했다. 동굴 속 한국 젊은이들이 동요하는 그때, 또 다른 한국인이 우리 큰아버지를 보며 “이 사람은 전주 신흥학교 교장 선생님의 아들입니다. 믿을 수 있는 분이니 믿고 따라가 봅시다. 내가 보장합니다”라며 우리 큰아버지를 알아보고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고 한다. 마침내 굴속에 있는 마흔여덟 명이 일렬로 서서 미국 진영으로의 행렬을 시작했다. 난 큰아버지께 “어떻게 이렇게 용감한 행동을 어떻게 했습니까?”라고 물어보니 “내가 용감하게 한 것은 맨 앞에 서서 미군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DON’T SHOOT(총 쏘지 마라)’이라고 한 것 말고는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부대의 지역 사령관은 “전투 중에 포로들을 이렇게 많이 데려오면 어쩌란 말인가. 이 포로를 지킬 전력이 어디 있냐”며 큰아버지를 심하게 질타했다. 그러나 큰아버지의 해법은 지혜로웠다.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가 어떤 사이인지 모르십니까? 일본은 조선 민족을 30년 이상 지배했고 한반도에 많은 고통을 가져온 한국 사람의 적입니다. 사령관님, 이들에게 총을 나눠주고 일본 포로를 지키게 하고, 일본 포로를 지키던 미군 병사를 전투에 투입하면 되지 않겠습니까”라며 사령관을 설득했다. 정말 기가 막힌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은 지난 30년 동안은 제조업을 하지 않고 값싼 다른 나라의 물건을 사서 애용한 결과 물건을 제조하는 능력을 예전보다 많이 상실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가 일어나면서 전세계적인 반도체 부족 현상이 일어났고,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에 많은 부분을 의존했던 미국은 어려움을 겪게 되고 중국의 압박도 받게 된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한국은 제조업 분야에서 수출 실적을 계속 올리고 있고, 이제는 제조업에 있어서는 미국이 한국을 스승으로 모시고 다시 배워야 할 날이 왔다. 미국과 한국은 서로에게 꼭 필요한 관계가 되었고, 이념과 사상을 뛰어넘어 서로 도우며 살아가야 하는 동반자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