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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주의 아트&디자인

이태리 장인 말고 우리 장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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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은주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 츄리닝은 댁이 생각하는 그런 옷이 아냐.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수놓은···.”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주인공 김주원(현빈 분)이 파란색 비즈가 촘촘히 박힌 옷을 입고 했던 대사를 기억하나요? 그 이후로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이란 말은 우리 사회에서 ‘정성’으로 만든 ‘고퀄(높은 품질)’의 명품을 뜻하는 말로 자리 잡았습니다. 장인이 모든 공력(功力)을 쏟아부어 완성한 것, 즉 디테일로 승부하는 작품 말이죠.

서울 안국동에 문을 연 공예박물관에선 관람객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이 대사를 탄성처럼 읊조리게 되는 공간이 있습니다. ‘자수, 꽃이 피다’ ‘보자기 일상을 감싸다’ 전이 함께 열리고 있는 전시3동 사전가(絲田家) 직물관입니다. 손톱 크기만 한 골무부터 향낭·보자기·방석·병풍에 놓인 정교하고 화려한 자수를 보면 ‘이태리 장인도 울고 갈’ 우리 선인들의 솜씨에 놀라게 되니까요.

그곳에서 만나는 자수 보자기는 하나하나가 한 폭의 그림입니다. 가로·세로 길이 40㎝의 바탕천에 보색 대비로 수놓아진 나무와 새, 꽃의 디테일에 누구나 빠져듭니다. 자투리 천을 모아 만든 조각보 역시 허투루 만들어진 게 없습니다. 패턴 구성과 색 배합만 봐도 현대 추상화 걸작이 부럽지 않습니다. 추상회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네덜란드 화가 피에트 몬드리안(1872~1944) 작품에 견줄 걸작들이 그곳에 즐비합니다.

가지각색의 조각 천에 자수를 놓은 보자기. [사진 서울공예박물관]

가지각색의 조각 천에 자수를 놓은 보자기. [사진 서울공예박물관]

생전에 예술가라 불리지도 않았고, 보자기에 자기 이름을 남기지도 않았지만 천 조각, 바늘과 실에 장인의 열망을 바친 여인들의 유물을 마주하며 마음이 절로 경건해집니다. 기술적인 솜씨를 창의적인 일로 쳐주지 않았던 시대, 자수와 보자기에 재능과 창작 욕구를 쏟아부은 여인들의 삶을 뒤돌아보게 됩니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요. 자칫 뿔뿔이 흩어지고 사라졌을 자수와 보자기가 한 컬렉터 부부의 신념과 열정으로 이렇게 남았습니다. 이 공간은 한국자수박물관 허동화(1926~2018) 관장과 부인 박영숙(89) 씨가 기증한 5000여 점의 소장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생전 인터뷰에서 허 관장은 “1960년대 초반 외국인이 화조(花鳥)로 수 놓인 병풍을 헐값에 사 가는 것을 보았다”면서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만든 저 아름다운 물건이 제값도 못 받고 해외로 반출된다는 것이 속상해” 수집을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20~30대가 서울공예박물관에 열렬히 환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술관서 만나는 그림 또는 조각 작품과 달리 일상과 예술을 결합한 공예품의 매력을 알아보고 있는 것이죠. 공예는 전통과 현대를 잇고, 일상과 예술·디자인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듭니다. ‘한 땀 한 땀’의 감동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