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소문 포럼

국민의힘과 영국 보수당

중앙일보

입력 2021.08.17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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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형구 정치에디터

김형구 정치에디터

영국 보수당은 1997년 5월 총선에서 역대급 참패를 당한다. 그러자 한 달 뒤 당수 경선에서 파격적 승부수를 띄운다. 36세의 윌리엄 헤이그를 대표로 선출한 거다. ‘제3의 길’로 정권 교체에 성공한 44세의 토니 블레어 노동당 정권을 의식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하지만 헤이그는 잦은 말실수 등으로 자질 논란을 겪다 2001년 총선에서 패배하고 물러났다.

위기 땐 극약처방 마다 않은 보수당
국민의힘, 분열 속 비전 제시 못해
혼란 계속되면 보수 재기는 난망

계속 길을 잃고 헤매던 보수당이 2005년 택한 신임 당수는 39세의 소장파 재선 데이비드 캐머런. 그의 슬로건은 ‘현대적이고 공감하는 보수주의(modern, compassionate conservatism)’였다. 그는 보수 진영이 소홀했던 사회적 약자 배려와 환경보호 등 개혁정책에 앞장섰다. 보수당 노선을 오른쪽에서 가운데로 옮겨놓은 캐머런의 노력은 2010년 선거 승리와 함께 13년 만의 정권 탈환으로 결실을 보았다.

영국에서 20세기는 ‘보수당의 세기’다. 집권 기간이 노동당보다 압도적으로 길다. 그러나 공짜로 얻은 건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윈스턴 처칠이 이끄는 당이 1945년 총선에서 노동당에 뜻밖의 일격을 당했을 때도 보수당은 모든 걸 바꿨다. 취약했던 청년조직을 재건했고, 처칠이 “우리 당에도 사회주의자가 있느냐”고 했을 만큼 급진적이었던 ‘산업헌장’을 내놨다. 극약 처방도 마다하지 않는 각고의 쇄신 끝에 1951년 정권을 탈환했다.

서소문 포럼 8/17

서소문 포럼 8/17

새삼 영국 보수당의 악착같은 부활사(史)를 거론하는 건 대한민국 보수 정당인 국민의힘의 어지러운 현실이 너무나 대비돼서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정말 대표가 되는 게 맞느냐”며 경계심을 표했다는 36세의 이준석 대표. 하지만 그가 취임한 지 두 달 남짓 된 지금, 국민의힘의 혼란과 균열은 심각하고 위태롭다. 고래·고등어·멸치, 레밍, 하이에나·멧돼지·미어캣 등 당 대표와 대선 주자들이 주고받은 거친 언사는 적전 분열을 노골화했다. ‘대표 탄핵론’까지 터져나온 이(이준석)-윤(윤석열) 갈등의 본질은 드러난 현상보다 훨씬 복잡하고 심층적인 듯하다. 최근 회자되는 이 대표의 3월 유튜브 영상 속 ‘반 윤석열 친 유승민’ 발언이 갈등의 근원을 추정케 한다. 여기에 이-윤 통화 녹취록 유출 사태까지 더해져 싸움이 막장극으로 치닫고 있다.

내전도 문제인데 정작 더 큰 위기는 따로 있다. 13명이나 되는 대선 주자 누구도 사람들 가슴을 뛰게 만드는 희망과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의 당선 가능성이 높게 점쳐졌던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란 구호 하나로 쇠락해가는 러스트벨트 유권자들의 심장을 자극하며 정권을 가져갔다. 지금 국민의힘에선? 반문 기치만 높고 “모든 걸 되돌려놓겠다”는 과거 회귀론만 울린다. “무너진 공정과 상식을 다시 세우겠다”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연이은 실언 논란에 휩싸이더니 지지율이 완만한 하향세다. 다크호스라는 최재형 전 감사원장도 왜 자신을 지지해야 하는가에 대한 시원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현안 질문에 “공부가 덜 됐다”고 하고, “문재인 정권 모든 규제를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며 과거와의 싸움에 주력한다.

이 와중에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끝내 ‘합당 결렬’을 통보했다. 대선 구도는 다시 3자 구도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 국민의힘으로선 내우(內憂)에 외환(外患)이 겹친 격이다. 민주당에서 “내년 대선은 결국 민주당과 민주당의 싸움”(전직 의원)이란 얘기가 나오는 게 허언은 아닌 듯하다.

영국 보수당 300여 년 역사를 다룬 책『보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의 저자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보수당의 생존 비결로 ①고루한 원칙·이념보다 집권을 우선시하고 ②변화를 거부하지 않는 유연함이 있으며 ③다수를 포용하는 정당으로 외연을 넓혀왔다는 점을 꼽았다. 강력한 집권 의지, 유연성, 확장성 이 세 가지가 국민의힘에서도 제대로 작동한다면 정권 교체는 가까워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 국민의힘 내부 총질은 집권 의지를 의심케 하고, 반문 정서와 영남 지역주의에 기대는 대선 주자들에게선 유연성을 보기 어려우며, 실용적 중도 정당을 표방하는 국민의당과의 통합 결렬은 확장성에 의문을 갖게 한다.

“보수당의 긴 역사 동안 언제나 성공적인 이야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보수당을 어렵게 만든 건 무엇보다 당내 갈등과 분열, 그리고 취약한 당 지도자의 리더십이었다.” 강 교수가 책 말미에 제시한 결론이다. 국민의힘이 새겨들어야 할 얘기 아닌가. 오늘 당장 대선을 치른다면 국민의힘이 보수 재기의 역사를 쓰긴 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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