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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림의 모든 점, 그것은 살아있는 생명의 표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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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노은님 작가는 단순하고 천진한 형태로 자연의 생명력을 표현한다. ‘어항’(1992, 캔버스에 아크릴, 70x100㎝). [사진 가나아트]

노은님 작가는 단순하고 천진한 형태로 자연의 생명력을 표현한다. ‘어항’(1992, 캔버스에 아크릴, 70x100㎝). [사진 가나아트]

“저는 원래 화가로 태어난 것처럼 느껴져요. (그림을 그린 지) 50년 다 됐는데도 그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이상한 사람이 돼가고 있어요(웃음).”

가나아트센터서 노은님 개인전 #꾸밈없고 원시 생명력 담은 그림 #개막 사흘 만에 31점 중 29점 판매 #항암 치료하며 매일 밥 먹듯 작업

재독화가 노은님(75) 화백이 2019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 강연에서 한 말이다. “젊은 시절 고독과 방황 속에서 마치 큰 벌을 받는 사람처럼 지냈다”는 그는 “외로워서 괴로웠고, 괴로워서 외로웠다. 나는 그 덕에 많은 그림을 그려냈다”고 했다.

그런 시간이 그에게 선물을 준 것일까. 그의 그림은 ‘외로움’ 혹은 ‘괴로움’과는 거리가 멀다. 맑고 푸른 물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힘찬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한 작품은 대담한 선과 색으로 전하는 위로와 즐거움에 가깝다.

‘무제’(1998, 종이에 혼합매체, 100x70㎝). [사진 가나아트]

‘무제’(1998, 종이에 혼합매체, 100x70㎝). [사진 가나아트]

물고기와 새, 꽃 등의 자연물로 생명이라는 주제를 다뤄온 노은님의 개인전 ‘생명의 시작: am Anfang’이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1980년대 작품부터 지난해 완성한 신작까지 총 31점을 선보이는 자리. 국내에선 2년 만에 열리는 전시인데도 반응이 심상찮다. 개막 전 작품의 절반이 ‘예약’ 됐고, 개막 3일 만에 초대형 작품 등 두 점을 제외하곤 29점이 모두 팔렸다.

노은님은 독일에 정착한 지 50년이 넘는 파독 간호사 출신이다. 1946년 전주에서 태어난 그는 1970년 독일로 이주했다. 함부르크 시립외과병원에서 간호보조원으로 일하던 당시 간호장이 우연히 그의 그림들을 보고 병원에서 전시를 열도록 주선하면서 본격적으로 미술의 길로 들어섰다. 그 전시를 계기로 73년 국립 함부르크 미술대학 회화과에 한국인 최초로 입학했고, 독일 표현주의와 바우하우스를 대표하는 거장 한스 티만 교수의 가르침을 받았다. 졸업 후 전업 작가로 활동하던 그는 한국 작가로서는 최초로 국립 함부르크 조형예술대학 정교수로 임용돼 20여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대형 캔버스에 그린 ‘찾아온 손님’(2017, 캔버스에 아크릴, 100x224㎝). [사진 가나아트]

대형 캔버스에 그린 ‘찾아온 손님’(2017, 캔버스에 아크릴, 100x224㎝). [사진 가나아트]

노은님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생명’이다. 생명의 시작을 의미하는 점(點)은 그의 화면에 자주 등장하는 요소다. 과감한 붓질로 파랑·빨강·초록 등 원색으로 그려낸 고양이와 물고기, 새와 꽃, 개미 등엔 반드시 점이 찍혀 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점은 곧 눈(目)이란다. 살아있는 존재, 즉 생명의 표식인 셈이다.

그는 자신의 시화집  『눈으로, 마음으로』에서 “나는 모든 물체에 눈을 그려 넣는다. 나무에 눈을 달아주면 잎이 살아나고, 곤충들은 날아다니고, 물고기들은 우주를 여행한다”고 썼다. “내가 큰 대자연 앞에서 작은 모래알 같은 존재임을 알았다”는 그는 가장 단순한 형태로 자연의 형상을 표현해왔다. “모든 복잡함이나 기술을 떠나 단순함이 남아 있을 때 예술은 살아난다”는 신념에서다.

노은님

노은님

이번 전시엔 각각 1984년, 1996년, 2003년에 그린 ‘무제’ 연작도 선보인다. 오랜 시차를 두고 그린 것이지만 나란히 놓인 화면엔 물고기와 새의 탄생을 담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지난해 그린 대작 ‘생명의 시작’도 눈에 띈다. 단순하고 대담한 선에 맑고 힘찬 기운이 화면에 가득하다.

2019년 노 화백에겐 중요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첫째는 독일 미헬슈타트 시립미술관에 노은님 작가를 소개하는 영구 전시실이 마련된 것. 1450년에 지은 미술관 건물을 새로 보수하면서 새로 마련된 작은 공간엔 그의 그림과 더불어 그의 고향 전주와 서울, 함부르크 등 세 도시를 소개하는 사진이 걸렸다.

바로 이어 그는 암 진단을 받았다. 노 화백은 본지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처음엔 깜짝 놀랐다.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붓을 놓은 시간도 있었다”면서도 “하지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건강이 나아져 요즘엔 독일 남부에 있는 미헬슈타트에서 매일 산책하며 지내고 있다”고 전했다. 틈틈이 그림도 다시 그리느냐는 질문에 그는 “틈틈이가 아니다. 그림은 매일, 밥 먹듯이 그리고 있다”고 답했다.

2007년 개인전을 열며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인생의 숙제를 푸는 데 그림은 나에게 도구였으며 길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나를 태우고, 녹이고, 잊고, 들여다보았다. 살아남는다고 전쟁터 병사처럼 싸울 필요는 없다. 오히려 풀밭에서 뛰노는 어린아이 같아야 한다.” 노은님의 놀이는 오늘도 ‘현재 진행형’이다. 전시는 2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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