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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태워달라” 카불 공포의 대탈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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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난 15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미국대사관에선 성조기가 내려갔고 탈레반이 장악한 대통령궁엔 탈레반 깃발이 올라갔다. 일부 아프간 국민은 이날부터 과거 ‘공포정치’로 악명 높았던 탈레반의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으로 몰려 필사의 탈출을 시도했다. 16일 수천 명이 몰려와 비행기를 태워 달라며 활주로를 장악하자 공항 운영은 마비됐다. 1975년 남베트남 패망 당시 ‘사이공 탈출’을 연상시켰다.

탈레반 아프간 장악에 시민들 패닉 #수천명 몰린 카불공항 아비규환 #“두려움에 도망치지 말고 남아라” #탈레반, 경찰·정부군 사면령에도 #20년전 ‘극단적 통제’ 기억 뚜렷 #테러 조직 인큐베이터 역할 우려도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공항에서 16일 이 나라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문 열린 비행기에 탑승하려고 필사적으로 탑승교에 오르고 있다. 전날 탈레반이 카불에 입성하고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이 국외로 도주하면서 나라를 떠나려는 사람들이 몰려 공항은 아수라장이 됐다. 16일 미군이 질서 유지를 위해 발포하고 최소 다섯 명이 숨졌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총격에 의한 것인지, 깔린 것인지 상황이 모호하다. [트위터 캡처]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공항에서 16일 이 나라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문 열린 비행기에 탑승하려고 필사적으로 탑승교에 오르고 있다. 전날 탈레반이 카불에 입성하고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이 국외로 도주하면서 나라를 떠나려는 사람들이 몰려 공항은 아수라장이 됐다. 16일 미군이 질서 유지를 위해 발포하고 최소 다섯 명이 숨졌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총격에 의한 것인지, 깔린 것인지 상황이 모호하다. [트위터 캡처]

카불 하늘길은 16일 미국 등 각국 정부가 자국민을 실어나르기 위해 급파한 항공기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막혔다.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은 밀려든 인파로 인해 모든 민항기의 운항을 중단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라온 공항 영상에는 시민들이 비행기 탑승교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모습이 포착됐다. 또 다른 영상엔 공항으로 달려가는 시민 행렬이 담겼다. 총소리와 아이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AFP통신은 “미군이 이들을 활주로에서 쫓아내기 위해 경고사격을 가했다”고 전했다. 한 미국 관리는 로이터통신에 “공항에 몰려든 군중이 통제 불능 상태였다”며 “발포는 혼란을 완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WP) 등은 “공항에서 아프간인이 여러 명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목격자들은 최소 5명의 사망자를 봤다고 전했지만 사인이 총격인지, 압사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탈레반 “히잡만 쓰면된다”지만, 여성들 가혹한 율법 악몽

아프가니스탄의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이 지난 15일 국민을 버리고 우즈베키스탄으로 도피한 뒤 대통령궁을 접수한 무장 탈레반 대원들이 집무실을 차지하고 있다. 이날 대통령궁엔 탈레반 깃발이 걸렸다. 2014년부터 대통령직을 수행한 가니는 2006년 유엔 사무총장에도 출마했다. [AP=연합뉴스]

아프가니스탄의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이 지난 15일 국민을 버리고 우즈베키스탄으로 도피한 뒤 대통령궁을 접수한 무장 탈레반 대원들이 집무실을 차지하고 있다. 이날 대통령궁엔 탈레반 깃발이 걸렸다. 2014년부터 대통령직을 수행한 가니는 2006년 유엔 사무총장에도 출마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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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구호단체가 운영하는 병원엔 이날 카불에서 80명의 부상자가 이송됐다.

은행에서도 사람들이 앞다퉈 몰려 현금을 인출하거나 달러 사재기를 했다. 현지 화폐인 아프가니 환율은 지난주 달러당 80아프가니에서 이번 주 100아프가니로 뛰었다. 탈레반은 전날에 이어 16일에도 과거 집권기(1996~2001년)의 강경 이미지와 다른 유화 제스처를 취했다. 이들은 과거 국호인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에미리트’ 명의의 메시지에서 “아프간 국민은 정상적인 삶을 영위해 나가라”고 촉구했다.

수하일 샤힌 탈레반 대변인은 “아프간 정부나 군에서 일한 모든 이들은 용서받을 것이며 누구에게도 복수할 계획이 없다”며 “아프간인들은 두려움에 도망치지 말고 남아 달라”고 요청했다. 약 35만 명의 정부군과 경찰에는 “무기를 반납하고 탈레반에 합류하면 사면하겠다”고 했다.

샤힌 대변인은 BBC 인터뷰에서 “앞으로 수일간 아프간에서 평화로운 권력 이양을 원한다”는 입장도 밝혔다. 또 다른 탈레반 대변인인 자비훌라 무자히드는 “주민과 외교사절의 안전을 지원하고 모든 아프간 인사와 대화할 준비가 됐다”고 강조했다. 로이터는 과도정부의 수반은 알리 아흐마드 잘랄리(81) 전 내무부 장관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앞서 탈레반은 국제사회가 우려하는 여성 권리도 존중하겠다고 했다. 탈레반 측은 지난 15일 “히잡(이슬람 여성의 스카프)을 쓴다면 여성은 학업과 일자리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며 “여성 혼자 집 밖에 나서는 것도 허용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일련의 메시지는 과거 탈레반의 모습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슬람주의자 집단인 탈레반은 과거 집권기에 샤리아(이슬람 율법)를 앞세워 엄격하게 사회를 통제했다. 음악·TV 등 오락을 금지했고 도둑은 손을 자르고 불륜을 저지른 사람은 돌팔매로 처형하는 가혹한 중세 형벌을 적용했다. 남자들은 수염을 길러야 했고, 여성은 외출할 때 부르카(온몸과 얼굴까지 천으로 가리는 복장)를 착용해야 했다. 여성의 취업과 각종 사회활동을 제약했으며 교육 기회를 박탈했다.

세계적 문화유산인 바미안 석불 파괴, 무함마드 나지불라 전 대통령의 고문 및 공개 처형, 여성 공개 총살 등 탈레반의 야만적 행위가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아프간 여성들은 이미 두려움에 떨고 있다. 가디언에 따르면 원래 한 벌에 약 200아프가니 정도이던 부르카 가격이 최대 3000아프가니까지 뛰었다.

국제사회가 우려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아프간이 테러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마크 밀리 미 합참의장은 “아프간에서 알카에다 같은 테러 조직을 재건하는 데 2년이 채 안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고 CNN이 보도했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간은 이슬람국가(IS)나 알카에다의 잔당이 세력을 키울 수 있는 터전이 될 가능성이 크다”며 “특히 지방 탈레반 세력과 테러 조직이 뒤섞여 새로운 형태의 테러 프랜차이즈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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