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대사관, 미군헬기로 탈출…대사는 교민 1명 위해 남았다

중앙일보

입력 2021.08.16 19:31

업데이트 2021.08.16 22:19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아프간) 카불 시내에 총성이 빗발치고, 공항에는 필사적으로 카불을 빠져나가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린 가운데, 주아프가니스탄 한국 대사관 공관원 대부분이 15일(현지시간) 무사히 탈출을 완료했다. 다만 최태호 대사 등 공관원 3명은 여전히 카불에서 마지막 남은 교민 한 명을 보호하고 있다.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정권을 재장악하면서 수도 카불 주민들이 아프간을 탈출하기 위해 카불 공항으로 몰려든 모습. 트위터 캡쳐.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정권을 재장악하면서 수도 카불 주민들이 아프간을 탈출하기 위해 카불 공항으로 몰려든 모습. 트위터 캡쳐.

①우방국 "한국도 공항으로 얼른 가라"

16일 외교부에 따르면, 전날인 15일 오후 아프간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면서 정의용 장관 주재로 외교부 본부와 아프간 현지 대사관 사이 화상 회의가 2시간 넘게 열렸다고 한다. 회의 막바지에 최 대사 등 공관원들에게 우방국으로부터 메시지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상황이 급박하니 한국 공관원들도 빨리 카불 공항으로 이동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정 장관이 "일단 빠질 수 있는 건 다 빼라"는 결정을 내리며 대사관 철수가 시작됐다. 공관은 기밀문서 등을 폐기하며 급박하게 철수 준비에 나섰다.

②마비된 공항..탈출 어떻게?

철수 결정은 내려졌지만, 카불 공항은 이미 마비였다. 공항은 민간 부문과 군사 부문으로 나뉘는데, 두바이에서 들어오는 민항기가 이날 오후 회항하는 등 민간 부문은 완전히 막힌 상황이었다.
군사 부문도 미군 군용 자산만 겨우 오가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외신과 현지 언론 등에 따르면, 카불 공항에선 순식간에 활주로까지 몰려든 인파와 이를 통제하기 위한 미군의 발포 등으로 사상자가 속출하는 상황이었다.

한국 대사관 대부분 제3국 철수
서울과 회의 도중 "탈출하라" 급보
'미국이 철수 지원’ 양국 미리 합의
공항서도 미군 자산으로 제3국행

그렇다면 한국 공관원들은 어떻게 무사히 카불을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선견지명이었는지, 정부는 올해 상반기 미국과 '아프간에서 유사 상황 발생 시 한국 공관원들의 철수를 미국이 지원한다'는 내용의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미국과 MOU에 따라 한국 공관원들은 대사관에서 공항까지 미군 헬기를 타고 이동한 뒤, 미군 자산을 활용해 공항에서 중동 제3국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외교부 당국자는 "현재 카불에서는 헬기를 타지 않고선 육로로는 공항까지도 갈 수 없는 상황"이라며 "혹시 몰라 미리 보험에 들듯 MOU를 맺어뒀는데 마침 딱 맞게 쓸 수 있었던 셈"이라고 말했다.

탈레반의 정권 재장악 이후 아프가니스탄 카불을 탈출하려는 시민들이 공항으로 몰려가가는 모습. 트위터 영상 갈무리.

탈레반의 정권 재장악 이후 아프가니스탄 카불을 탈출하려는 시민들이 공항으로 몰려가가는 모습. 트위터 영상 갈무리.

당초 공관 직원들은 오후 9시 30분에서 오후 10시쯤 카불을 출발할 예정이었다. 외교부 본부는 아프간 대사관 철수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오후 9시쯤 기자단에 엠바고(일정 시점까지 보도 금지)를 전제로 공유했다. 오후 10시 30분쯤이면 철수가 완료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공관원들이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다는 공지와 함께 엠바고가 해제된 것은 오후 11시 53분이 돼서였다. 1시간 30분 가까이 탈출이 지연된 것 역시 현지의 급박한 상황 때문이었다. 공항까지 갔다가 공습 사이렌이 울려 비행기가 뜨지 못하고 공관원들은 다시 이동하는 등 숨가쁜 1분 1초가 이어졌다는 것이다.

③대사는 아직 현지에..교민 1명 곧 출국

공관원 모두가 카불을 빠져나온 건 아니다. 최 대사를 비롯한 공관원 3명은 대사관 문을 잠궈놓은 채 카불 모처로 피신했다. 현지 생업을 이유로 끝까지 남아있던 교민 한 명도 함께 보호하고 있다.
정부의 설득 끝에 해당 교민은 이르면 16일 중 인근 국가로 피신할 계획이라고 한다. 외교부 당국자는 "현재 공항을 오가는 수단이 미군 자산밖에 없는 만큼, 교민분도 이를 이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마지막 교민 1명까지 철수하더라도 대사 일행이 카불을 떠날지는 아직 미정이다. 아프간과의 외교관계 등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16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카불 공항에 탈출을 위해 몰린 인파. AFP. 연합뉴스.

16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카불 공항에 탈출을 위해 몰린 인파. AFP. 연합뉴스.

④대사관, 제3국 피신해 업무 이어갈 듯

실제 정부는 아프간 정권을 탈환한 탈레반과 한국의 외교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 고민 중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아프간 새 정권(탈레반)과 당장 직접 접촉하긴 어려운 상황"이라며 "대사관 잠정 폐쇄가 당장 단교를 뜻하진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는 한국이 탈레반 과도 정부를 공식 정부로 인정할지 문제와도 얽혀있다.

외교부 당국자는 아프간 대사관의 추후 운영 방안에 대해선 "과거 리비아, 예멘 사태 때도 대사관이 현지에서 철수한 뒤 현재는 각각 튀니지, 사우디아라비아에 임시로 공관을 운영 중"이라며 전례를 살펴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외교부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최근까지도 미 정보당국은 "아프간 정권이 탈레반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최소 석 달은 버틸 것으로 예상했다"고 한다. 외교부 당국자는 "탈레반이 예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카불로 진격해온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탈레반이 미국 등 관련국의 예측을 깨고 아프간 정권을 순식간에 탈환한 배경에 대해 외교부 당국자는 "아프간 정부군이 탈레반에 맞설 의지가 사실상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도 소개했다. 정부군 대부분이 '지금이라도 투항하라'는 탈레반의 설득에 응하거나, 쉽사리 도주했다는 설명이다.
이 당국자는 "소수의 아프간 특수군의 경우 정권이 탈레반에 넘어가면 끝장이라는 생각으로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면, 이외 대부분 일반 병사들은 의지 자체가 약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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