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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려막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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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강기헌 기자 중앙일보 기자
강기헌 산업1팀 기자

강기헌 산업1팀 기자

“한국의 신용위기가 플라스틱 버블로 재현될 조짐을 보인다.”

2002년 4월,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한국의 신용카드 대란을 이렇게 압축했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진 후 정부가 신용카드 경기 부양에 나선 게 화근이었다. 카드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신용카드를 발급했다. 번화가에선 사은품을 내걸고 신용카드 신청을 받는 가판대가 등장했다. 수입이 없는 대학생도 서명만 하면 신용카드를 발급해줬다.

대가는 컸다. 카드사의 빚은 90조원에 육박했다. 1999년 8월 무너진 대우그룹의 빚 60조원을 넘어섰다. 카드 남발은 가계 빚 급증과 신용불량자 양산을 불렀다. 빚 내서 빚을 갚는 돌려막기란 신조어도 이 무렵 만들어졌다. 아랫돌을 꺼내 윗돌을 괴는 하석상대(下石上臺)가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작은 플라스틱 카드가 경고한 것이다.

하지만 돌려막기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경험칙으로 남지 못했다. 재판이 한창인 라임자산운용 펀드 사건과 옵티머스 사태는 자산 돌려막기로 투자자를 속였다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돌려막기는 일상 깊숙이 파고들며 누구나 쓰는 단어가 됐다. 개방형 사전에도 등록됐다. 국립국어원의 참여형 국어사전 우리말샘은 돌려막기를 이렇게 정의한다. ‘부족한 돈이나 물건 따위를 다른 곳에서 빌리거나 구하는 일을 되풀이하여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함.’ 코로나 발 개인파산 급증에 돌려막기는 표준국어대사전마저 점령할 기세다.

문재인 정부 들어 돌려막기는 그 의미를 확장했다. 인사 돌려막기, 예산 돌려막기에 이어 백신 돌려막기까지 등장했다. 모더나 백신 수입 물량이 절반으로 줄자 정부는 1, 2차 백신 접종 간격을 6주로 늘렸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등록된 의약품 용법·용량도 가볍게 무시한다. 화이자와 모더나 백신 1, 2차 접종 간격은 각각 3주와 4주다. 일부 언론이 세계보건기구(WHO) 권고안을 기반으로 접종 간격을 6주로 늘려도 문제가 없다는 뉴스를 내보내고 있지만, 이는 델타 변이가 지배종이 되기 전에 만든 것이다. 델타 변이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선 2차 접종이 필수라는 연구 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접종 간격을 6주로 조정한 건 1차 접종률을 높이기 위해 2차 백신을 끌어다 쓴 돌려막기 때문이다. 이젠 돌려막기식 K방역에서 벗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