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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상 30만명’ 아프간 유령군인, 싸울 의지도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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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이슬람주의 세력인 탈레반이 15일 수도 카불에 입성하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결국 20년 만에 미국과 친서방 정부의 패퇴로 막을 내리고 있다. 2001년 9·11테러로 촉발된 이 전쟁은 이달 말 미국의 철군 완료로 막을 내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아프간 정부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투항과 후퇴를 거듭했으며 탈레반은 예상보다 빠르게 진군해 왔다.

탈레반에 투항·탈영하는 아프간군 #외신 “군간부, 급료 챙기려 허위 기재 #실제병력 5만명, 제대로 먹지도 못해” #무연고지에 투입, 거점 더 쉽게 포기 #미국 “아프간 위해 아프간이 싸워라”

아프간 정부군은 왜 이리 쉽게 무너졌을까. 숫자만 보면 병력·화력에서 탈레반을 압도한다. 미 아프간재건특별감사관실(SIGAR)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4월 기준 병력이 30만699명에 이른다. 핵심 전투원이 6만~7만5000명으로 추산되는 탈레반의 4~5배다.

탈레반, 아프가니스탄 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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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군엔 매년 50억~60억 달러(약 5조8000억~7조원)의 막대한 예산이 투입됐다. 미국은 2005년부터 지난 6월까지 아프간군기금(ASFF)으로 750억2000만 달러(약 87조7000억원)를 지원했다. 무기와 장비, 훈련비 등을 합쳐 지난 20년간 아프간군에 830억 달러(약 97조원)를 쏟아부었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이 돈이 어디로 흘러갔는지는 미스터리다. BBC는 정부군 병력의 상당수가 장부에만 존재하는 ‘유령 군인’이라고 보도했다. 부패한 간부들이 급료를 가로채려고 숫자를 허위로 기재해 군 당국은 실제 가용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도 파악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뉴욕타임스(NYT)는 미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아프간 정규군의 실제 병력은 장부상 30만의 6분의 1 수준”이라고 보도했다.

사기 저하도 심각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정부군은 부패한 정부와 정치인들이 예산을 빼돌려 제대로 먹지도 못하게 되면서 싸울 동기를 잃었다”고 전했다.

영국 싱크탱크인 왕립합동군사연구소(RUSI)의 잭 와틀링 연구원은 “정부군은 종족·가족 연고가 없는 곳에 투입되는데 이 때문에 거점을 더욱 쉽게 포기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탈레반의 실제 전투원이 알려진 것보다 많다는 지적도 있다. BBC는 “다른 무장조직과 동조 세력까지 합치면 탈레반 세력은 2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추산했다. 국민이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에 등을 돌린 게 탈레반 세력 확장의 배경으로 꼽힌다.

왓슨연구소에 따르면 미국은 아프간에 친서방 민주정부를 심으려고 지난 20년간 2조2610억 달러(약 2600조원)를 쏟아부었다. 재건비와 전쟁 예산, 참전용사 관리, 전쟁 차입금 예상 이자 등을 합친 금액으로 올해 한국 국방예산(52조원)의 50배나 된다.

문제는 고질적 무능·부패로 상당액이 중간에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발간된 미 의회 보고서에 따르면 재건 비용 1430억 달러(약 167조원) 중 적어도 190억 달러(약 22조원)는 행방이 묘연하다.

권력다툼도 한몫했다. 2014·2019년 대선은 부정으로 얼룩졌다. 2019년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과 상대 후보인 압둘라 압둘라는 모두 승리를 선언하고 같은 날 카불의 각기 다른 곳에서 동시에 취임식을 열었다.

지난달 23일 미국의 ‘내셔널인터리스트’는 “미군 철수가 예정돼 전력 확충이 시급했던 10개월 동안 국방부 장관이 공석이었다”고 보도했다. 가니 대통령은 직접 군대를 지휘하겠다며 임명을 늦추다 지난 6월에야 장관을 임명했지만 민심은 이미 돌아섰다. 탈레반의 파상 공세에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아프간이 아프간을 위해 싸울 때”라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해 왔던 이유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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