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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때부터 나라꽃인데…” 홀대받는 무궁화를 위한 변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무궁화 변호사’ 조민제씨는 인터뷰에 앞서 “무궁화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며 기자를 약속 장소인 서울 광화문의 한 고층건물 주차장으로 안내해 활짝 핀 무궁화를 보여줬다. 전수진 기자

‘무궁화 변호사’ 조민제씨는 인터뷰에 앞서 “무궁화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며 기자를 약속 장소인 서울 광화문의 한 고층건물 주차장으로 안내해 활짝 핀 무궁화를 보여줬다. 전수진 기자

“최근에 무궁화 보신 적 있으신가요?”

‘무궁화 변호사’ 조민제씨 #‘일본꽃’ 주장한 책 절판 시키고 #김원웅 광복회장 추천도 철회시켜 #“김구·안창호, 민족의 꽃으로 추앙”

지난 12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조민제 변호사는 명함도 교환하기 전 대뜸 이렇게 물었다. 머뭇거리는 기자를 향해 싱긋 웃더니 “무궁화는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며 건물 주차장으로 안내했다. 고층건물 사이 금 간 벽과 벽 틈에서, 가까스로 스미는 볕 한 줄기를 받으며 무궁화 한 그루가 분홍빛 꽃을 피워냈다. 그는 “명색이 국화(國花)인 무궁화가 정작 (한국에서는) 홀대받는 경우가 많다”며 “무궁화는 미국 동부, 유럽 등 다양한 곳에 자생한다. 프랑스 파리시청 앞을 장식하는 대표적 여름 정원수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조 변호사의 전문 분야는 기업 분쟁이다. 하지만 열정으로만 따지면 무궁화라고 할 만하다. 약속이 있으면 먼저 도착해 주변에 무궁화가 있는지 살핀다. 무엇이 그를 ‘무궁화 변호사’가 되도록 이끌었을까. 최근 수년간 이어진 무궁화 수난사가 그 계기였다. 그는 “무궁화는 사실 일본 꽃”이라고 주장하는 책이 버젓이 판매되는 걸 보고 두 팔을 걷어붙였다. 김원웅 광복회장이 추천했던 책이다. 조 변호사 노력으로 책은 절판됐고, 김 광복회장도 추천을 철회했다.

조 변호사는 “무궁화의 고향은 히말라야 인근으로 추정된다. 그곳에서 세계 각지로 퍼졌으며, 한반도에서는 통일신라 때부터 국화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통일신라 말의 문장가 최치원이 897년 발해와 외교전을 펼치며 당나라에 보낸 서한이 그 근거다. 최치원이 초안을 잡은 외교 서한의 일종인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에 통일신라를 ‘근화향(槿花鄕)’ 즉 ‘무궁화의 나라’로 칭한 대목이 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국화로서 무궁화의 상징성이 더 빛났다는 게 조 변호사 설명이다. 그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하면서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은 그대로 쓸 수 있게 했지만, 신하들 대례복에 수놓았던 무궁화는 쓰지 못하게 했다”며 “이후 김구, 안창호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이 무궁화를 민족의 꽃으로 추앙했다”고 강조했다.

사실이 이러한 데도 왜 무궁화는 일본의 꽃이라는 주장이 생겼을까. 조 변호사는 “일본에 가면 무궁화가 잘 가꿔진 곳이 많다”며 “정작 우리는 애국가에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면서도 잘 돌보지 않아 소중함을 모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무궁화를 많이 심어만 놓고 정권에 따라 방치하거나 이용했다”며 “무궁화를 학대해온 셈”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외국 꽃인 모란꽃은 영양제까지 주며 키우고, 무궁화는 방치하는 게 한국의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무궁화 변호사’로 이름을 얻은 그는 우연한 계기로 식물에 관심을 갖게 됐다. 경남 마산 인근이 고향인 그는 어린 시절 변호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부친은 맏아들인 그의 법대 진학을 오매불망했다. 반항심으로 서울대 경영학과에 진학한 그는 학생운동을 하다 제적당했다. 뒤늦게 사법시험에 합격하자 부친은 “결국 너의 천직”이라며 좋아했다고 한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즈음 그는 무리해서 일하다 심장 대동맥 문제로 쓰러졌다. 의사 조언으로 심장에 무리가 가지 않게 산책을 시작했다. 그러자 꽃과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최근 그는 조선 시대 식물 연구서인 『조선식물향명집』의 주해서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를 펴냈다. 내년 삼일절 즈음에는 무궁화 관련 책도 펴내고 싶은 마음이다.

조 변호사는 “지금 읽고 있는 책”이라며『정원의 쓸모』라는 책을 기자에게 건넸다.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식물을 돌보는 일은 기본적으로 성심을 기울이는 활동이다. 진정한 돌봄은 상대를 수용하고, 바깥에 있는 누군가 또는 무언가의 요구에 우리를 맞추고 집중하는 것이다.” 무궁화에 대한 그의 마음이 꼭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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