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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엔 30만, 현실 5만…최악 패전 부른 아프간 '유령 군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탈레반이 아프간의 도시를 속속 장악하면서 탈레반을 피해 도망쳐온 난민들이 수도 카불의 대피소에 머물고 있다. 연합뉴스

탈레반이 아프간의 도시를 속속 장악하면서 탈레반을 피해 도망쳐온 난민들이 수도 카불의 대피소에 머물고 있다. 연합뉴스

아프가니스탄(아프간) 주요 도시를 모두 장악한 이슬람 무장 세력 탈레반이 15일(현지시간) 수도 카불로 들어섰다. 로이터통신은 아프간 내무부 관계자를 인용해 탈레반이 카불의 사방에서 진입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아프간 내무부 장관은 이날 “탈레반에 평화롭게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밝혔다고 AFP통신이 속보를 전했다.

탈레반, 수도 카불 함락 초읽기 #무능·부패 정부에 등돌린 미국 #"아프간 위해 아프간이 싸워라"

스푸트니크 통신은 알 아라비야 보도를 인용,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이 향후 몇 시간 이내에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전했다.
아울러 알리 아마드 자랄리 전 내무장관이 새 과도정부의 수장으로 내정됐다고 보도했다.

탈레반은 전날 북부의 요충지 마자리-이-샤리프, 동부의 잘랄라바드까지 점령해 이미 카불을 포위한 상태였다.

지난 6일 님로즈의 주도 자란즈를 점령하며 행동 개시에 나선 지 8일 만에 아프간 34개 주의 주도(州都·주의 수도) 중 23곳이 탈레반 수중에 떨어진 데 이어서다. 탈레반은 사실상 수도 카불만을 통제하고 있던 아프간 정부군 측에 ‘백기 투항’을 종용했다. 수도 함락이 가시화되면서 미국이 치른 역사상 가장 긴 전쟁인 '아프간 20년'이 미국의 패퇴로 막 내리게 됐다.

아프가니스탄.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아프가니스탄.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①‘밑 빠진 독’ 더는 안돼 미국

지난 2001년 9·11테러로 촉발돼 20년을 끌어온 아프간 전쟁은 애초 이달 말 미국의 완전 철수로 종지부를 찍을 계획이었다. 지난 5월 미군 철수가 본격화되고 탈레반의 파상공세가 시작됐지만 미국의 철군 계획은 변하지 않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아프간이 아프간을 위해 싸울 때”라고 철수를 거듭 재확인했을 뿐이다.

바이든은 아프간 전쟁을 통해 9·11 테러의 범행 배후인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하고 국제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위협을 낮추는 성과를 거뒀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당초 아프간 전쟁의 목적은 기존 집권 세력인 탈레반을 축출하고 친 서방 성향의 민주정부 수립이었다. 이를 위해 미국이 지난 20년간 아프간에 쏟아부은 비용은 2조2610억달러(약 2600조원)에 이른다(왓슨연구소). 전쟁 예산, 참전용사 관리, 전쟁 차입금 예상 이자 등을 아우른 금액으로 올해 한국의 국방예산(52조원)의 50배나 됐다.

이같은 막대한 투입에도 아프간 정부는 자립하지 못했고, 국민들의 신뢰도 잃었다. 2014년과 2019년 치러진 아프간 대선은 모두 부정선거로 얼룩졌다. 2019년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과 상대 후보 압둘라 압둘라는 모두 승리를 선언하고 같은날 카불의 다른 장소에서 동시에 취임식을 열기도 했다. 미군 철수가 예정된 가운데 자력 국방을 확충해야 할 시점에 10개월이나 국방장관은 공석이었다. 가니 대통령은 지난 6월에야 국방부장관을 임명했지만 민심은 "너무 늦었다"며 돌아섰다. 지난달 23일 미국의 '내셔널인터레스트'는 이 사실을 지적하면서 지도층 분열이 심한 가운데 가니 대통령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겠다며 일부러 국방장관을 임명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 연합뉴스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 연합뉴스

아프간 재건에 들어간 지원금도 복잡한 중간 전달 체계를 거치면서 상당 부분 사라졌다. 지난해 발간된 미 의회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이 아프간 재건에 투입한 1430억달러(약 167조원) 중 최소 190억달러(약 22조원)는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동맹국들이 미국을 향해 "아프간 전면 철수를 재고하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미국 내에서는 "밑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소모전을 끝낼 때"라는 주장이 힘을 얻은 이유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은 아프간 정부를 계속 지원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아프간 지도자들이 자신들을 위해 싸워야 한다"며 ‘당신들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발을 뺐다.

미국의 아프간 20년 전쟁.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미국의 아프간 20년 전쟁.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②장부 상에만 존재, 아프간 정부군

탈레반은 아프간 정부군을 상대로 '사상자 없는 승리'를 거듭해 왔다. 탈레반과 맞닥뜨리면 정부군은 변변한 교전 한번 없이 대거 투항하거나 중요한 거점·기지를 버리고 탈영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런데 병력·화력만 보면 정부군은 탈레반을 압도한다. 미국 아프간재건특별감사관실(SIGAR) 보고서에 따르면 올 4월 기준 아프간 정부군의 숫자는 30만699명이다. 반면 탈레반 반군의 핵심 전투대원은 6만~7만5000명으로 추산돼 5분의 1 수준이다.

정부군에는 막대한 예산도 투입됐다. 아프간 정부군은 연간 50억~60억달러(약 5조8000억~7조원) 규모의 예산을 사용했다. 미국이 아프간군 기금(ASFF)으로 지원한 자금만 2005년부터 올 6월까지 750억2000만달러(약 87조7000억원)에 달한다. 무기와 장비, 훈련비 등을 모두 합치면 미국이 지난 20년간 아프간군에 쏟아부은 돈은 830억달러(약 97조원)이라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이 돈이 어디로 갔는지가 미스테리다. BBC는 정부군 병력의 상당수가 장부에만 존재하는 '유령 군인'이라고 보도했다. 부패한 군경 간부들이 급료를 가로채기 위해 허수로 군인 수를 기재하는 바람에 군 당국은 실제 가용 병력 수가 얼마인지 파악조차 못한다는 것이다. SIGAR는 정부군의 부패로 인해 병력 통계에 대해 "매우 우려되는 수준"이라고 밝혔다. 뉴욕타임스는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아프간 정규군의 실제 병력은 30만명의 6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탈레반과 비슷하거나 더 적을 수 있단 얘기다.

아프간 정부군의 모습. 연합뉴스

아프간 정부군의 모습. 연합뉴스

사기 저하도 심각하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정부군은 부패한 정부와 정치인을 위해 싸울 동기를 잃었다"며 "그들이 예산을 모두 빼돌려 정작 정부군은 제대로 먹지도 못한다. 이들이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할지 알지 못한다"고 전했다. 영국의 안보 싱크탱크인 왕립합동군사연구소(RUSI)의 잭 와틀링 연구원은 "정부군은 종족이나 가족 연고가 없는 곳에 투입되는데, 이것 또한 정부군이 쉽게 거점을 포기하는 이유"라고 분석했다.

③월남 패망 때보다 빠른 탈레반

탈레반의 아프간 장악 속도는 미국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앞서 미 정보기관들은 아프간 정부가 미군 철수 후 2년간 유지될 것으로 전망했다. 1975년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한 뒤 사이공이 몰락하기까지 걸린 기간과 동일하게 잡았다. 그러다 두 달 전 미국 정보공동체가 아프간 정부 붕괴 시점을 앞당겨 6개월로 제시했다. 하지만 미군의 완전 철수를 2주 앞둔 상황에서 탈레반은 수도를 포함, 전국을 사실상 장악했다.

탈레반은 과거보다 훨씬 정교한 전략으로 아프간 정부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전통적으로 탈레반은 아프간 남부 농촌 지역에서 맹위를 떨쳤지만 미군 철수가 시작되자 반(反) 탈레반 정서가 강한 서부와 북부의 대도시를 기습 공격했다. 허를 찌른 전략으로 탈레반은 주요 도시를 손에 쥐고, 동시에 미군이 정부군에 제공한 엄청난 양의 현대식 무기와 실탄까지 빼앗았다. 군용차량, 야간 투시경, 기관총, 박격포 등이다.

탈레반의 실제 전투요원 수도 알려진 것보다 많다는 외신 보도도 나왔다. BBC는 "다른 무장세력과 후원인력까지 더하면 탈레반 조직원 수는 20만명이 넘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아프간 내에 반미 감정이 커진 것도 탈레반 세력 확장의 간접적인 동력이다. 미국이 수립한 아프간 정부의 무능과 부패가 국민을 등 돌리게 만들었다.

헤라트를 장악한 뒤 무장한 채 경계를 서고 있는 탈레반. 연합뉴스

헤라트를 장악한 뒤 무장한 채 경계를 서고 있는 탈레반. 연합뉴스

또 아프간 정부와 갈등 관계인 파키스탄이 과거부터 탈레반을 물밑 후원하며 든든한 배후 노릇을 해왔다. 파키스탄의 파슈툰족은 탈레반 탄생기부터 이슬람학교에서 양성한 학생을 탈레반 전사로 꾸준히 공급해왔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일지.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아프가니스탄 전쟁 일지.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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