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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김연경 보유국 문재인 보유국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49호 31면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퇴직한 선배한테서 문자가 왔다. 배구 경기를 보다 떠올랐다면서, ‘김연경과 문재인이 같이 있는 나라’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써보면 어떻겠냐는 거였다. “그래도 희망을 가져보자”라는 주제라는 부연 설명까지 있었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게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느낌인 데다, 칭찬과 비판이 뻔하게 가름되는 얘기였던 까닭이다. 진보 성향(특히 대북 문제에 있어서)의 그 선배조차 ‘문재인 보유국’보다는 ‘김연경 보유국’을 더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주장으로서 책임 다한 김연경 #후배들 포기 막고 원팀 만들어 #대통령은 처참 인사 책임 안 져 #흠과 책임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다음날 돌연 두 사람이 엮이는 일이 벌어졌다. 여자배구 대표팀의 귀국 기자회견 사회자가 무리를 했다. 역시 배구선수 출신인 사회자는 보기에도 안쓰럽게 상황을 몰아갔다. 우리 대표팀이 포상금을 받으려고 뛴 것도 아닌데, 후배인 김연경 선수에게 굳이 포상금 액수를 재확인시켰다. 그 포상금을 대통령이 사재 털어 준 것도 아니고 감사 인사를 할 건 대통령인데, 오히려 김 선수한테 대통령의 (당연한) 격려에 감사할 것을 강요했다.

“진짜 보는 내내 질문과 태도가 너무 ‘처참’해서 제가 다 선수에게 미안했다”는 댓글이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비난이 빗발쳤고, 김 선수나 문 대통령 두 사람 모두 애꿎은 피해자가 됐다. 국민들 마음에도 생채기가 남았고, 오직 한 사람 또는 한 단체의 미래만 생각한 숟가락 올리기 역시 실패로 끝났다.

모든 사람이 패배자로 남는 이런 상황이 왜 벌어질까. 고민 끝에 내린 나의 결론은 리더십의 문제다. 이제 제보한 선배의 높은 눈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걱정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을 비교해야 한다.

선데이칼럼 8/14

선데이칼럼 8/14

김연경의 리더십은 어쩌면 이번 올림픽의 백미였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해보자! 후회하지 말고!”라고 후배들을 독려하던 그의 외침이 특히 빛났다. 그 외침으로 패색 짙던 게임을 두 번이나 뒤집었지만, 그것은 승리의 주문(呪文)이 아니었다. 승패를 떠나 제 할 일을 다 하지 않는 후배들에 대한 일침이었다.

승패를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리 강팀을 만나도 주눅들 일이 없다. 내 자리에서 내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면 그만이다. 그러다 진다고 탓할 사람도 없다. 그런데 미리 포기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후배들을 그냥 넘기지 않은 것이다. 그게 올림픽 정신이고, 그런 김연경에 세계가 열광한 것이다. 한국에 역전패한 일본에서조차 “김연경에게 혼나고 싶다”는 유머가 나온 게 다른 이유가 아니다.

김연경의 리더십은 그가 국가대표로 한국에 도착해서부터 시작됐다. 주장으로서 팀워크를 해치는 사례들은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 과정에서 (그도 원치 않은 결과였겠지만) 주전이 두 명이나 이탈해야 했다. 그렇게 ‘김연경 혼자 다 하는’, 비정상이 되고 만 팀을 일깨워 모든 선수가 한 몸이 돼 움직이는 ‘원팀’으로 만든 게 그의 리더십인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대단히 불행하게도, 문 대통령의 리더십은 그런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처참’의 연속이다. 리더십의 요체는 책임이다.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해 마음껏 능력을 발휘하게 한 뒤, 결과에 대해서는 인사권자가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런데 문 대통령의 인사는 망사(亡事)에 가깝고, 책임은 ‘나 몰라라’인 게 현실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4000만회분을 구했다고 자랑하던 백신이 감감무소식이어서 2차 접종을 못 하는 상황이 됐는데도 유감 표명조차 없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국산백신 개발에 더욱 속도를 내고 글로벌 허브 전략을 힘있게 추진”한다는 하나 마나 한 얘기인 걸 보면, 과연 대통령이 상황 보고를 제대로 받고 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청와대에 방역기획관 자리를 신설하면서 굳이 “백신 확보는 급할 것 없다”고 주장하던 인물을 앉히는 인사의 불가피한 결과일지 모른다. 국민이 느끼는 처참함은 늘 부록처럼 따라붙는다.

4년 넘는 시간 동안 켜켜이 쌓여온 예들이 너무도 많아 열거하기 어렵다. 사실 예전 걸 들출 필요도 없다. 언제나 새로운 것이 준비돼있으니 말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공영방송 KBS를 편파방송의 상징으로 만들었던 인물을 방송통신심의위원장으로내리꽂는 인사가 강행되고, 권력을 비판하는 언론에 재갈을 물릴 언론중재법이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대선 정국에서 그런 시도들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짐작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공수처의 예에서 봤듯, 권력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만은 않는다.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설령 원하는 대로 정권 연장에 성공한다 해도 그 책임이 영원히 묻히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최고권력자에게 집중된다. 전직 대통령들의 말로를 보면서도 모른다면 어리석다.

미국 남북전쟁 때 노예 해방을 위해 헌신한 헨리 워드 비처 목사의 말이 그것이다. “일을 도모함에 거짓이 있는 사람은 베틀의 실을 끊은 것과 같다.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잊어버릴 무렵 그 흠이 드러난다.” 이제라도 새겨들을 일이다. 권력자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처참함 대신 (선배 말대로) 희망을 갖고 싶은 국민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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