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국악계 이단아’ 판타지 사극 새 실험…“시나위처럼 신명나죠”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49호 19면

[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뮤지컬 ‘금악’ 연출 원일 경기시나위 예술감독 

원일 예술감독은 “우리 콘텐트로 ‘라이온킹’처럼 판타지와 예술성 넘치는 국민뮤지컬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했다. 전민규 기자

원일 예술감독은 “우리 콘텐트로 ‘라이온킹’처럼 판타지와 예술성 넘치는 국민뮤지컬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했다. 전민규 기자

18일부터 29일까지 경기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열리는 새 창작뮤지컬 ‘금악’은 조선시대 궁중 음악원의 금지된 악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다. 그런데 제작진이 엉뚱하다. 지난해까지 경기도립국악단으로 불렸던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가 제작하고, 이곳의 예술감독 원일(54)이 연출자로 나섰다.

인간 욕망 깨우는 비밀 악보 소재 #한국판 ‘지킬앤하이드’ 보여줘 #“원래 호러 영화로 만들려던 것” #국악예술단체 대중성 확보 목표 #신명 되살릴 두 번째 작품도 준비

원일이 누구인가. 국가무형문화재 제46호 피리정악 및 대취타 이수자이면서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을 거치며 푸리·바람곶 등 해외에서 더 각광받는 창작집단을 조직해 음악실험을 쉬지 않았던  원조 ‘국악계 이단아’다. 한국 인디밴드의 조상격인 어어부 프로젝트를 결성했고, ‘꽃잎’ ‘황진이’ 등으로 대종상을 4차례나 수상한 영화음악 감독으로도 유명하다. 2015년 학교와 국립단체를 모두 떠나 개인 뮤지션으로 돌아가는가 싶더니, 2019년 말 경기도립국악단 예술감독으로 컴백했다. 지난해 단체명을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로 바꾸더니, ‘최고 스케일’을 내세운 뮤지컬을 한단다.

“여기가 단순한 국악관현악단은 아니에요. 성악파트와 연희파트가 있어 가극단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있는데, 그걸 못 살리고 있어 안타깝더군요. 제가 있는 동안 중장기 전략으로 그런 방향성을 세웠고, ‘금악’은 그 초석이 될 겁니다.”

대극장 뮤지컬 연출은 데뷔인 셈이지만 대학시절부터 음악극을 꾸준히 만들어 왔고, 2019년 제100회 전국체전 개폐회식 총감독 등 다양한 무대 연출 경험이 있기에 전문성은 뒤지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바람곶이 음악극앙상블이었어요. 바리데기 이야기로 음악극 3부작을 만들기도 했고, 연극음악, 영화음악을 숱하게 하면서 극예술에 참여해 왔죠. 극예술과 음악의 만남을 음악가가 주도하는 일이 잘 없지만, 다양한 경험을 해온 제가 시작해보려고요. 한 작품으로 평가받으려는 게 아니예요. ‘라이언킹’처럼 판타지가 있으면서 예술적으로도 인정받는 ‘국민 뮤지컬’을 우리 콘텐트로 만드는 게 목표죠. 그런 포부로 하지, 못 먹는 감 찔러보는 게 절대 아니예요.(웃음)”

‘금악’에는 팬텀싱어3 출신 라비던스 황건하 등이 출연한다. [경기아트센터]

‘금악’에는 팬텀싱어3 출신 라비던스 황건하 등이 출연한다. [경기아트센터]

‘금악’은 사람의 정서를 뒤흔드는 음악의 영향력에 대한 이야기다. 그가 자신을 투영해 직접 쓴 시놉시스가 출발점이 됐는데, 한국판 ‘지킬앤하이드’라 할 흥미진진한 변신 코드가 숨겨져 있다. “원래 판타지 호러 영화를 만들려고 했어요.(웃음) 소리가 욕망을 깨운다는 컨셉트인데, 고대부터 정서를 흔드는 음악을 금지하는 이론이 있었거든요. 사람을 흥분시키는 민속악은 예법에 어긋난다고 보고, 바를 정(正)자를 쓰는 정악, 예악을 추구했던 거죠. 사실 재미없잖아요. 인간의 욕망을 깨우는 비밀스런 악보가 있고, 내 안에 내가 깨워낸 존재가 있다는 현대적 코드를 넣어서 강력한 힘을 가진 음악이란 뭔지 얘기해 보려는 거죠.”

그런데 좀 이상하다. 다양한 실험을 하면서도 국악의 본질을 추구해 온 사람이, 개인 활동도 아니고 공공단체라는 큰 배의 방향성을 대중성 쪽으로 급하게 꺾고 있는 모양새 아닌가. 뮤지컬의 대중적 문법과 국악이 가진 본질이 과연 양립 가능할까. “오히려 개인 작업이 아니라서 이런 일을 하는 거예요. 공공단체는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도 중요한데, 와서 보니 26년 동안 고정 팬도 없이 뭐했나 싶더군요. 이대로는 공연예술로서 확장성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고, 우리 콘텐트로서 뭔가 보여주는 것 자체가 의미 있겠다 판단했어요. 제일 확실한 시장이 존재하는 게 뮤지컬이니 여기서 성공하면 인정받지 않을까요. 소소하게 정통성을 지켜가는 것보다 대중적 면모도 보여주면 기회가 열릴 테고, 그때 더 예술지향적인 활동도 펼칠 수 있겠죠. ‘금악’의 의미는 그런 다양성 확보에 있어요.”

각기 다른 개성의 작곡가 4명이 참여한다는 것도 독특하다. 직접 쓴 몇 곡 말고는 국악의 색깔도 진하지 않다. 경기필 현악주자 9명까지 총 33명의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여느 뮤지컬과 차원이 다른 웅장한 사운드를 만들어내지만, 방점을 찍는 건 ‘다양성’이다. 26년 역사의 단체명을 바꿀 정도로 ‘시나위’에 꽂혀있는 그답게 ‘시나위적인’ 뮤지컬을 만드는 것이다.

“시나위적인 구조는 기승전결이 아니라 ‘기경결해(起景結解)’ 플롯이죠. 서양식 드라마의 귀결이 파국으로 끝난다면 우리는 반드시 풀어지고 해소되는 지점을 만들어 놓거든요. 장단도 ‘덩더쿵 쿵 더러러러’ 하면서 마지막엔 영원히 어딘가로 없어질 것 같이 풀어버리잖아요. 끝맺음보다는 뒷풀이가 중요한 건데, 작품도 ‘금악’으로 인한 파국이 아니라 그 대척점에서 마음의 소리를 잘 듣고 그걸 노래하는 삶을 살라는 이야기로 끝나요.”

그가 말하는 ‘시나위’는 결코 ‘무속음악에서 사용되는 즉흥적인 기악 합주음악’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아니다. 흥·신명·장단·즉흥·영성의 5가지 필수 요소를 아우른 차원 높은 개념이다. “가장 시나위적인 인물이 백남준이에요. 직관과 즉흥과 첨단을 다 융합시킨 게 시나위죠. 문명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을 거침없이 섞어낸 백남준처럼, 저도 그렇게 되고 싶어요. 그래서 이런 일을 하는 거죠.”

커리어의 정점에서 다 던지고 내려왔던 건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한 절박함’ 때문이었지만, ‘경기시나위’를 이끌면서 적어도 흥과 신명을 되찾은 듯했다.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많기 때문이다. “야전에서 예술가로 살면서 얻은 인연 덕에 이른 나이에 교수가 됐는데, 현장에서 다 불태우는 사람들을 보면서 언제나 돌아갈 자리가 있는 제가 비겁해 보였어요. 방황하다 탈출 삼아 갔던 국립국악관현악단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죠. 허허벌판에서 다시 시작하려고 다 내려놨더니, 최전방으로 오게 됐네요. 제가 구상하는 것에 관해 최대한 지원 받는다는 조건이기에 뭐든 일으켜볼 수 있거든요. 역량 있는 외부 예술가들과 큰 판을 벌여 냉정하게 평가받을 수 있으니, 혼자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우리 음악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갈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어요.”

두 번째 뮤지컬도 벌써 구상 중이다. 유랑 예인들에 대한 오마쥬로, 코로나 이후 잃어버린 신명을 되찾기 위한 프로젝트다. 관현악단의 진면목을 보여주기 위해 9월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도 오른다. 대중성과 정통성의 극단을 아무렇지도 않게 오가는 이 사람, 대체 뭐가 되고 싶은 걸까. “저요? 멋진 곡을 쓰고 노래하고 싶어요. ‘금악’에도 ‘노래하라 노래하라’는 넘버가 있거든요. 언젠가 솔로 콘서트를 여는 게 꿈입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