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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가 남편 성 따르는 부부동성제, 일 다양성 결여 입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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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9호 27면

전 아사히신문 기자의 ‘일본 뚫어보기’

도쿄올림픽 성화 최종 점화자인 오사카 나오미. [사진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도쿄올림픽 성화 최종 점화자인 오사카 나오미. [사진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도쿄올림픽 개막식에서 주목받은 성화 최종 점화자는 여자 테니스 선수 오사카 나오미(大坂なおみ)였다. 오사카 선수는 아이티계 미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고 인종차별 반대 운동에 참여한 걸로 알려져 있다. 그녀가 성화 최종 점화자로 선택된 건 다양성을 강조하는 메시지로 보였다.

일본 법엔 남녀 한쪽 성만 선택 #‘전통’ 이유로 여성에 희생 강요 #여권·신용카드 등 명의 변경 불편 #‘부부별성’ 논의됐지만 흐지부지 #성화 점화한 오사카 패하자 비난 #“일본 낮은 인권 의식 탓” 시각도

그런데 일본에서는 도쿄올림픽 개막 전까지 몇몇 관계자들이 다양성을 부정하는 발언으로 자진해서 사임하거나 해임되는 일이 잇따랐다.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도쿄올림픽조직위원회 회장은 “여성이 많은 회의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발언을 해 해외에서 많은 비판을 받고 사임했다.

홀로코스트를 개그 소재로 삼은 전력이 공개되면서 물러난 개·폐막식 쇼디렉터인 고바야시 켄타로.[EPA=연합뉴스]

홀로코스트를 개그 소재로 삼은 전력이 공개되면서 물러난 개·폐막식 쇼디렉터인 고바야시 켄타로.[EPA=연합뉴스]

개막 전날에도 개·폐막식 쇼 디렉터인 고바야시 켄타로(小林賢太郎)가 해임됐다. 과거에 홀로코스트(유대인 대량학살)를 개그 소재로 삼은 영상이 공개되면서 파문이 커졌기 때문이다. 일본 국내에선 그렇게까지 큰 문제가 안 됐던 것도 해외의 시선으로 보면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 또 다른 사례다.

여성인 내가 일본에서 남녀 불평등을 느끼는 것 중 하나는 결혼하면 남편 성을 따라야 하는 ‘부부동성(夫婦同姓)’제도다. 내가 부부별성(夫婦別姓)이 일반적인 한국에 살고 있어서 더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일본 법은 남녀 어느 한쪽 성으로 하면 되는 거로 돼 있지만 96%는 남편 성을 따른다. 나도 남편 성으로 바꿨다. 바꾸기 싫은 건 남편도 마찬가지인데 남편에게 내 성으로 바꿔 달라고 할 순 없었다.

일 최고재판소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

일본 뚫어보기 삽화

일본 뚫어보기 삽화

그런데 성이 바뀌면 운전면허증, 여권, 신용카드 등등 모든 증명서와 서류, 카드 등의 명의를 바꿔야 하며 단지 심리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성을 바꾸는 과정에서 시간도 많이 뺏긴다. 그 번거로운 일을 결혼 초기에 경험하면서 남편 탓은 아닌데 괜히 남편이 미워졌던 기억이 난다.

나를 포함해서 일본 여성 기자들은 대부분 결혼해도 원래 성으로 활동한다. 독자들은 성이 바뀌면 다른 기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리카와(成川)’는 결혼 전 나의 성이지만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글을 쓸 때는 나는 항상 ‘나리카와 아야(成川彩)’를 사용해 왔다.

그런데 최근 한국의 어느 연구기관 의뢰로 원고를 보냈을 때 원고료 지급 전에 은행계좌 명의가 필자 이름과 다르다는 이유로 결혼관계증명서를 제출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원고료 지급 때문에 결혼관계증명서를 제출하라는 건 결혼 8년째 처음 있는 일이라 좀 놀랐다.

일본에 있는 남편한테 결혼관계증명서에 해당하는 서류를 떼서 해외우편으로 보내 달라고 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원고료를 받기 위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항의하는 뜻도 담아서 연구기관에 ‘원고료 안 받아도 됩니다’라고 답변했다. 결국 그쪽에서 서류 없이 원고료를 지급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예전에 한국 은행계좌 명의를 결혼 후 성으로 바꾸려고 했을 때는 “결혼 전의 여권이 필요하다”고 해서 일본에 가지러 간 적도 있다. 성을 바꾸고 싶어서 바꾼 것도 아닌데 그것 때문에 불이익을 받을 때마다 불합리하다고 느낀다.

일본에서 부부별성을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한국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일본에 대해 잘 아는 교수나 기자들도 “선택할 수 있게 된 것 아니었나?” 하고 놀란다. 그건 오래전부터 부부별성을 선택할 수 있게 하자는 논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2000년대 초반 대학생이었을 당시에도 ‘선택적 부부별성제’ 도입에 대해 오래전부터 논의해 왔다고 들었다. 그래서 내가 결혼할 때쯤엔 제도가 바뀔 거라고 낙관하고 있었는데 20년 지난 지금도 부부별성제는 실현되지 않고 있다.

테니스 여자 단식 3회전에서 탈락 후 고개를 떨군 오사카 나오미. [신화=연합뉴스]

테니스 여자 단식 3회전에서 탈락 후 고개를 떨군 오사카 나오미. [신화=연합뉴스]

도대체 언제부터 논의해 왔는지 궁금해서 지난 신문 기사를 찾아봤다. 1988년 아사히신문 칼럼 ‘천성인어(天声人語)’에 “영국에서는 여성은 남편 성으로 바꿔도 되고 안 바꿔도 된다”는 해외의 예를 들면서 일본의 상황에 대해 “회사나 조직에 따라 여성의 구성(舊姓)을 직업상 통칭(通稱)으로 인정하는 움직임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사회의 변화에 맞게 부부별성을 허용하면 어떠냐는 취지였다. 이것이 33년 전의 칼럼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부부별성을 인정해 달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는데 지난 6월 최고재판소는 부부별성을 인정하지 않는 현행법이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또다시 판단했다. 실망스러웠다. “국회에서 논의하고 판단해야 한다”며 공을 국회에 떠넘긴 셈이다. 최고재판소 판사 15명 중 여성은 2명뿐이었다. 여성이 반이었으면 판단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부부별성에 반대하는 사람 중엔 ‘일본의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여성에게 희생을 강요하면서까지 지켜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무엇보다 부부별성의 역사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아 이것을 일본의 전통이라 부르기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일본은 에도시대(江戸時代)까지만 해도 성을 가지는 사람은 일부였다. 일반인들이 성을 가질 수 있게 된 건 메이지시대(明治時代) 이후다. 부부동성이 도입된 건 1898년이며 그 당시 서양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부부별성을 선택할 수 있게 하거나 부부의 성을 결합하는 ‘결합성’을 인정하는 등 그동안 결혼 후 성 제도가 변해 왔다. 부부동성밖에 인정하지 않는 나라는 이제 일본 외에는 거의 없다.

‘부부동성’만 인정, 일본 빼곤 거의 없어

남편 성을 따르는 것에 거부감이 없거나 오히려 따르고 싶어 하는 일본 여성도 적지 않은 건 사실이다. 나는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특히 “아이와 같은 성이 되고 싶다”는 건 공감한다.

한국은 부부별성이라는 사실을 안 일본 친구들은 “그러면 아이 성은 어떻게 되냐”고 궁금해한다. 알아보니까 법적으로는 엄마 성을 따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아빠 성을 따르고 있다고 한다. 아이가 자기 성을 따랐으면 하는데 참고 있는 한국 엄마들도 더러 있지 않을까? 일본에서 결혼할 때 법적으로는 아내의 성을 따라도 되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기 어려운 것과 비슷한 상황인 것 같다.

다시 오사카 나오미 선수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테니스 단식 3회전에서 패배한 후 SNS나 뉴스 댓글에서 그녀를 비난하거나 차별적인 글을 올린 사람이 많았던 건 정말 안타깝다. 본인이 누구보다 이기고 싶었을 텐데 말이다.

잇따른 다양성을 부정하는 발언에 “일본 사회의 낮은 인권 의식이 드러났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번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해외에서 일본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 생각할 기회도 생긴 것 같다. 다양성을 강조한 개막식이 그냥 쇼가 아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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