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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학 대가 라티모어, 장제스·마오쩌둥 신임 얻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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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9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89〉 

전시수도 충칭의 장제스(오른쪽)와 라티모어(가운데). 왼쪽은 국민당 공군을 지휘한 시놀트. [사진 김명호]

전시수도 충칭의 장제스(오른쪽)와 라티모어(가운데). 왼쪽은 국민당 공군을 지휘한 시놀트. [사진 김명호]

미·중 관계는 나빴던 기간보다 좋았던 시절이 더 많았다. 한국전쟁 이후 20년간 지속된 적대관계도 말뿐이었다. 험담만 주고받았다. 정전협정 2년 후 대사급 회담도 시작했다. 대화를 계속하다 보니 협의에 도달하지 못해도 화약 냄새 풍길 이유가 없었다.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도 미국을 제국주의라 매도했지만 행동은 함부로 하지 않았다. 1958년 진먼다오(金門島) 포격할 때도 미국 군함은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지시했다. 미국 비행기의 국경 정찰과 영공 침범도 항의에 그쳤다. 100차례 이상 항의만 했지 공격은 자제했다. 세계혁명 부르짖던 황당한 시절에도 주적(主敵)은 미국이 아니었다.

루스벨트 대통령, 국·공 내전 우려 #장제스 정치고문에 라티모어 추천 #라티모어, 옌안서 마오쩌둥과 회견 #진주만 공습한 일, 중 고립화 전략 #미, 히말라야 넘어 중에 물자 공수 #미군 조종사 1500여 명 전사·실종

미·중, 험담 오갔지만 무력 대결 자제

중국전구사령관 장제스 대신 미국을 방문한 쑹메이링의 이동 행렬. 1943년 LA. [사진 김명호]

중국전구사령관 장제스 대신 미국을 방문한 쑹메이링의 이동 행렬. 1943년 LA. [사진 김명호]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 루스벨트는 국·공합작으로 시작한 일본과의 전쟁이 끝나면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을 우려했다. 마오쩌둥에게도 신경을 썼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 7월, 장제스(蔣介石·장개석)에게 중공에 우호적인 오웬 라티모어를 정치고문으로 추천했다. 록펠러재단의 지원으로 설립한 태평양국제학회 기관지 주간(主幹) 라티모어는 중국 변방지역 연구의 권위자였다. 1937년 중공의 항일근거지 옌안(延安)에 도착, 마오쩌둥, 주더(朱德·주덕),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와 회견한 후 중공의 민족정책을 찬양한 적이 있었다. 저서에 대담한 추론도 담았다. “중국공산당이 서북지역에서 소수민족과 연합해 펼치는 항일투쟁은 중국 역대 왕조의 연속을 보는듯하다. 소수민족과 함께 일본을 축출한 후, 수(隋)나라와 당(唐)나라처럼 광활한 변방지역에 근거지를 구축해 중원과 연해지역의 통치자를 부패세력으로 몰아 전복시키면 통일중국의 출현을 앞당길 수 있다. 동시에 내지(內地)와 변방이 서로 베풀며 행복과 즐거움을 함께하면 새로운 중국의 건설과 도약이 가능하다.” 예언자 같은 명언도 남겼다. “일본 군대는 녹슨 중국 군대의 칼을 예리하게 만드는 마도석(磨刀石)이다. 중공의 군대는 일본군과의 작전을 통해 단련됐다. 내전이 벌어지면, 일본군과 싸우기를 꺼리던 국민당군 주력은 일본군과의 작전에 적극적이었던 공산당군 주력을 당하지 못한다.”

전시수도 충칭(重慶)의 국민정부 고관들은 장제스 주변에 나타난,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하는 미국인이 누군지 궁금했다.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과 산책하며 대화 나누는 모습도 자주 눈에 들어왔다. 루스벨트가 파견한 라티모어라는 것을 알자 다들 기겁했다. 지식인들은 더했다. 말로만 듣고, 글로만 접하던, 라티모어는 세계적인 대가였다. 몽고와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동북지역을 답사하며 변방지역에 대한 거작을 여러 권 남긴 현대판 마르코폴로나 다름없었다. 오랜 해외 생활과 경험으로 다듬어진 통찰력과 폭넓은 시야는 서재에서 땀만 흘리는 학자나, 훈수에 능한 눈치꾸러기 고관들과는 격이 달랐다. 아태지역 14개국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집결한 태평양국제학회의 회원이며 1000권 이상의 학술서적을 출간한 기관지 주간이었다. 이쯤 되면, 장제스 일가의 성탄절 만찬에 초청받은 유일한 외국인이란 말도 헛소문이 아니었다.

1925년, 록펠러재단과 카네기재단의 공동 지원으로 설립한 테평양국제학회는 1960년까지 존속 했다. 4차 회의를 마친 회원들. 1931년 11월 2일, 상하이 진장(錦江)호텔. [사진 김명호]

1925년, 록펠러재단과 카네기재단의 공동 지원으로 설립한 테평양국제학회는 1960년까지 존속 했다. 4차 회의를 마친 회원들. 1931년 11월 2일, 상하이 진장(錦江)호텔. [사진 김명호]

장제스는 닝포(寧波) 방언이 심했다. 아랫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몰라 쩔쩔 맬 때가 많다 보니 장도 짜증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라티모어와의 대화는 통역이 필요 없었다. 미국에서 태어나자마자 부모 따라 강보에 쌓여 중국에 온 라티모어는 닝포 출신 보모의 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모국어인 영어보다 닝포 방언을 먼저 익혔다. 장은 이런 라티모어를 좋아했다. 첫 번째 대화도 맘에 들었다. 군인정치가 장제스는 독일의 소련 침공을 루스벨트가 어떻게 예측하는지 궁금했다. 라티모어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대통령은 독일군이 너무 깊숙이 들어갔다며 혀를 찼다. 전열을 정비한 소련이 승리하고 독일이 패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장이 무릎을 치며 말을 받았다. “맞다. 나도 대통령의 생각에 동의한다. 우리 장군들은 하나같이 독일의 승리를 예측한다.” 라티모어는 동북의 중요성을 누차 강조했다. “동북을 점령한 일본 관동군이 만주국을 세우자 동북청년들은 유랑민이 됐다. 이들을 충칭으로 끌어 모아 군복을 입히면 훗날 도움이 된다.” 장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런 일이 빈번하자 라티모어는 다른 방법으로 중국을 돕겠다며 귀국했다. 전시 정보국에서 중국 관련 업무를 했지만, 일이 일이다 보니 뭘 했는지 밝혀진 것은 없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하와이의 미 해군기지 진주만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튿날 미국과 영국이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중국정부는 하루 늦었다. 미국은 영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국전구(戰區)를 설립했다. 월남과 태국을 포함한 중국전구사령관에 장제스가 취임했다. 참모장은 미 육군중장 스틸웰 몫이었다. 태평양전쟁의 막이 올랐다.

미, 태평양전쟁 때 중국군 훈련시켜

일본은 버마(미얀마)를 점령, 중국을 외부와 단절시켰다. 미국은 인도에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윈난(雲南)성 쿤밍(昆明)까지 공중으로 전쟁물자를 운송했다. 1942년부터 3년1개월간 65만t을 실어 날랐다. 매달 평균 13대, 총 468대의 수송기가 중도에 추락했다. 1579명의 조종사가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인도에서 현대식 장비로 훈련시킨 중국군도 3만2000명을 웃돌았다.

태평양전쟁 기간 중공 근거지 옌안에도 미군과 미국기자들이 관찰조(觀察組) 명의로 진을 쳤다. 미군 관찰조는 중공 중앙과 팔로군, 신4군 지휘관들과 같은 밥 먹고 노래하며 훈련과 정보를 공유했다. 미군 관찰조의 보고서에 이런 내용이 있다. “중공 군대는 사기가 왕성하다. 국민정부를 거치지 않고 이들에게 직접 물자를 지원하면 일본을 빨리 패망 시킬 수 있다.” 심지어 예언에 가까운 섬뜩한 보고도 했다. “그간 우리가 국민당에 지원한 물자의 일부를 옌안에 제공하면, 이곳의 자칭 공산주의자들은 언제고 중국을 장악할 능력이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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