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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박질’ 꼴찌였지만 육상 좋아해, 손기정 선수 가장 흠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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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9호 16면

[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 〈24〉 육상 광팬 된 사연

1990년대 미국 LA에서 열린 육상대회에 각각 대회 명예회장과 축가 가수로 초청받은 고 손기정 선수와 조영남씨. [사진 조영남]

1990년대 미국 LA에서 열린 육상대회에 각각 대회 명예회장과 축가 가수로 초청받은 고 손기정 선수와 조영남씨. [사진 조영남]

빨리 약속대로 손기정 선수에 관해 써야 하는데 그래서 방금 전화를 끊었다. 남쪽 여수 어느 섬에 폼나는 서재 겸 미술 작업실을 만들어 놓은 독일 쪽 심리학자 김정운 교수의 전화였다. 나는 수 분간 일방적으로 타박만 받았다. 조심하시라. 김 교수는 선배고 후배고 그런 거 없이 마구 들이댄다. 요는 지금 귀하께서 읽고 계신 조영남의 중앙SUNDAY 내용이 최근 속도가 느슨해졌다는 것이다. 빌어먹을! 무슨 재주로 코로나와 무더운 땡볕 속에서 매주 원고지 20매를 속도 있게 쓰라는 건가. 실은 내가 약점 잡힌 게 있어서 대놓고 덤빌 수도 없는 처지다. 무슨 약점이냐고? 벌써 지난해 지나간 얘기니까 털어놔도 될 듯싶다.

머리와 몸집 불균형, 달리기에 불리 #반대 심리로 ‘담박질’ 단편소설도 써 #연예인 마라톤에서 등 떠밀려 우승 #미·캐나다 육상 대항전서 국가 불러 #손기정 명예 회장과 LA서 7박8일

5년간의 미술 대작 재판이 대법원까지 갔을 때 거기서 나한테 최종 진술 기회를 줬다. 그때 나는 무시무시한 대법 재판 현장 분위기를 약간 웃길 요량으로 끝머리를 이런 식으로 장식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재판장님! 옛 어른들이 화투를 가지고 놀면 패가망신한다고 했는데 제가 너무 오래 화투를 가지고 놀았나 봅니다.”

이렇게 진술해서 결국 무죄를 받게 된다. 문제는 패가망신 얘기를 내가 만들어낸 얘기가 아니라 순전히 김정운 교수의 코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도쿄 올림픽 트랙 경기 다 챙겨 봐

연예인 마라톤 대회에 출전했던 조영남씨. 조씨 왼쪽이 가수 김흥국, 오른쪽이 개그맨 황기순. 알고 보니 몰래카메라였다. [사진 조영남]

연예인 마라톤 대회에 출전했던 조영남씨. 조씨 왼쪽이 가수 김흥국, 오른쪽이 개그맨 황기순. 알고 보니 몰래카메라였다. [사진 조영남]

김 교수가 뭐라건 말건 금년 여름 나는 살판 났다. 왜 살판났냐. 바로 일본 올림픽 때문이다. 이건 딴 얘기지만 지금 일본은 로마제국의 멸망처럼 왠지 되는 일이 없어 보인다. 서서히 기우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잘나가던 소니도 삼성이나 LG 밑으로 들어갔고 이제 도요타까지 현대 기아 밑으로 들어갈 것 같으니 말이다. 금년 올림픽 좀 보시라! 무관중의 운동회라니! 안쓰럽기가 그지없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나는 살판 났다. 까짓 무관중이면 어떠냐! 양궁을 시작으로 수영 배구 축구 다 재밌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서기 2021년 8월 7일 토요일 저녁 7시쯤부터 나는 황홀의 극치였다. 이렇게 내 생애를 통틀어 나 혼자 신바람 나는 저녁은 결코 없었다. 아시다시피 올림픽 속에는 수많은 종류의 운동이 있다. 별의별 게 다 있다. 그중에서 내가 유독 좋아하는 운동이 딱 한 가지 따로 있으니 그게 뭐냐 바로 육상이다. 그렇다. 트랙 경기다. 뛰는 경기 ‘담박질’이다. 우리 충청도에선 뛰는 걸 ‘담박질’이라고 한다. 100m, 200m, 400m, 800m, 1500m, 1만m, 그 안에 짬짬이 계주, 그리고 마라톤!

몇 달 전 바꾼 새 삼성폰에서 유튜브 표시만 누르면 각종 육상에 관한 정보가 주르르 나온다. 나는 88 올림픽 때 존 덴버와 함께 ‘Perhaps Love(아마도 사랑일 거야)’를 함께 부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100m의 칼 루이스와 벤 존슨이 대결하는 모습도 보았고, 어여쁜 미국 처녀 그리피스 조이너가 100m 신기록 세우는 모습도 내 눈으로 직접 지켜본 사람이다. 올림픽에서 노래한 것보다 육상경기를 직접 본 게 더 좋았다. 그로부터 30여 년 만에 지난 주말 100m 여자 세계 신기록 깨는 모습을 비롯, 특히 꿈의 이상형이었던 35세의 아기 엄마 앨리슨 펠릭스가 미국 여자 1600m 릴레이 경기에 나와 우승하는 모습도 보고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서 네덜란드로 이주해 온 여자 중장거리의 시판 하산 선수가 여자 1만m에서 우승하는 모습도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

나는 담박질이야말로 운동의 뿌리라고 생각해왔다. 내가 왜 육상을 좋아하는지 나만의 슬픈 곡조를 털어놓겠다. 나는 삽교초등학교(당시 200여 명) 때부터 모든 과목에서 상위 그룹에 속했는데 유독 담박질 만큼은 늘 꼴찌였다. 반 전체에서 꼴찌. 남들은 그 느낌을 알 수 없다. 얼마나 내가 육상에 열등의식(?)이 있었으면 훗날 MBC 주최 전국 연예인 마라톤 대회에 출전을 했겠는가. 여의도에 가보니 진짜였다. 관중도 모여있고 게다가 경찰차까지 보냈으니 장난이 아니구나 철석같이 믿고 뛰어봤다. 중간쯤까진 간신히 따라갔는데 흥국이를 비롯 옆에서 뛰던 사람들이 자기네끼리 얘기하는 걸 들었다. “야! 시키야 제1회 연예인 마라톤 대회인데 우리가 1등 들어가면 어떻게 해. 영남이 형님을 1등 하게 만들어야지” 하며 등 떠밀고 부축하다시피 해서 여의도 한 바퀴를 돌고 내가 1등 테이프를 끊었는데 가물가물 정신없는 가운데 이경규가 날 내려보는 것이었다. 아! 그때 최고 인기를 끈 몰래카메라였다.

한편 홍수근이라는 삽교초등학교 6학년 선배는 공부도 1등이고 전교 회장이고 무엇보다  400m 계주 마지막 주자였다. 나는 평생 그의 뒤를 추적하며 살아왔다는 줄거리다. 다음호에 자세히 쓰도록 하겠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 마라톤 일본 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사진 가운데). 월계수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렸다. [중앙포토]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 마라톤 일본 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사진 가운데). 월계수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렸다. [중앙포토]

나는 왜 꼴찌인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내 머리통이 내 몸집에 비해 불균형하게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대 심리로 나는 육상을 미치도록 좋아하게 된 거다. 내가 첫 번째 혼자 살기 시작했을 때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최초로 단편소설(원고지 70매)을 한 번 써봤는데 오죽했으면 제목이 ‘담박질’이었겠는가. 이런 미세한 심리를 김정운 교수가 알기나 할까.

자! 이젠 본론으로 들어가자. 지난번 얘기 때는 내 방 벽화(벽에 걸린 사진틀 속의 인물도 미학적으로 벽화의 인물이라 칭할 수 있다)의 인물 중엔 ‘쥴리’는 없고 대신 마릴린 먼로가 있다고 얘기하면서 내 방 벽면에 추가하고 싶은 인물론 손기정 선수의 이름을 댔다. 요컨대 내 평생 내가 본 사람 중에서 다른 사람에겐 좀 미안하지만 총체적으로 가장 흠모하는 사람이 바로 손기정 선수다. 나는 일찍부터 단군 할아버지 바로 다음으로 손기정 선수를 높게 쳤다. 내가 평소 ‘오감도’를 쓴 시인 이상(李箱)이나 단군교를 세우려다 실패한 나철(羅喆) 선생 같은 이를 흠모하는 것과는 또 다른 얘기다. 이것은 극히 개인적인 나만의 비밀종교 같은 얘기다. 그가 한국 근대사에서 최초로 우리 대한민국 사람이 이 세상에서 우수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냈기 때문이다. 그것도 우리 민족이 일본한테 핍박받던 중에 말이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는 걸 일깨워주었다. 스스로 말하지 않았던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시상대에서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려야 했다고 말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들 그런다. 바로 그거다. 내가 40대 후반 때 한참 잘 나갈 때 나는 그토록 열망했던 손기정 선수를 직접 만나게 된다. 만난 정도가 아니다. 무려 7박 8일을 미국 LA 지역에서 동고동락하게 된다. 지금 생각해봐도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스토리는 이렇다. 미국 LA에서 친하게 된 어느 태권도 사범으로부터(와! 당시 외국에 나간 우리 태권도 사범들의 위세는 상상 이상이었다) 연락이 왔다. 미국과 캐나다 대항 육상대회에 날 더러 양쪽 국가를 불러달라는 요청과, 여기가 대박이다, 대회의 명예 회장이 바로 손기정 선수라는 것이다. 꿈이 아니라 생시에 그런 출연 요청이 들어온 것이었다. 몇 해였는지 그런 거 따지는 건 인젠 부질없어 보인다. 첫 대면은 김포공항인 것으로 기억된다. 인간 손기정! 꼭 내 아버지 조승초씨 같았다. 말투부터가 심한 고구려 말투였다. 거기다 단순한 인간형이었다. 어린아이 같은 단순함 바로 그것이었다. 어쩌다 마라톤 선수가 됐냐는 질문을 받으면 뭐 그런 걸 묻느냐는 식으로 “그때 뭐 할 게 있었나. 학교 선생님들이 ‘너 잘 뛴다. 뛰어봐라’ 해서 뛴 거지 뭐”,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는 남자 중에 상남자였다.

손기정 선수, 인자한 진짜 사나이

하여간 손기정 선수와 함께(한때 세계에서 제일 잘 뛰었던 사람과 깡촌 삽교초등학교에서도 가장 꼴찌로 뛰었던 두 사람, 더 이상 재미있는 조합이 어디 있겠나) 미국 LA로 건너가 실제로 캐나다 국가와 미국 국가를 수천 명 관중 앞에서 불렀다. 딴 얘기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지구상에 내가 들어본 각 나라 애국가 중엔 단연 미국 국가 ‘The Star-Spangled Banner(별이 빛나는 깃발)’가 최상이다. 그걸 내가 수천 명 관중 앞에서 부른 것이다. 나는 끝부분쯤 “While the land of the free” 하는 부분을 노래하는 도중에 벌써 천둥번개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허허! 누가 믿기나 하겠는가. 손기정 선수와 동고동락 이틀 만인가 사흘 만에 손 선수가 나한테 “형님”으로 호칭하는 것이었다. 잠깐 중앙SUNDAY 독자 제위님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손기정 어르신의 이론은 분명했다. 누구든 그날 밥값 술값 내는 사람이 ‘형님’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손기정 선수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많은 땅을 직접 하사받았다는 얘기도 직접 들었고 그걸 살면서 몽땅 날려버렸다는 얘기도 직접 들었다. 난 내 주제에 손 선수를 마구 야단쳤다. 내 야단에 아무 대꾸도 못 하셨다. 나는 또 한 번 화를 냈다. 이번엔 나 혼자 내는 화였다. 동작동 내 아파트로 저녁 초대를 했더니 거기 가는 버스가 있냐? 고 묻는 소리를 듣고 나는 빌어먹을 세상이라고 한탄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 기사가 나가면 거기에 나온 당시 마라톤 신기록의 손기정의 사진을 내 방 벽에 추가해야겠다. LA에서 육상대회가 끝나고 어스름한 저녁이 되면 나한테 “형님, 오늘 저녁 끽” 하시며 술잔 들어 올리는 모습을 지어 보이시던 천하에 인자하고 너그럽고 바다 같은 넓은 마음씨의 소유자, 말 그대로 진짜 사나이. 손기정 어르신, 그가 그립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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